고려시대 이혼제도
- 최초 등록일
- 2020.04.27
- 최종 저작일
- 2010.07
- 6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2,000원
소개글
"『고려시대 이혼제도』"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들어가며
2. 이혼제도
2-1. 법을 통해 살펴본 이혼제도
2-2. 사례를 통해 살펴본 이혼제도
2-3. 이혼당한 여성들의 삶
4.나가며
본문내용
1. 들어가며
고려는 조선과는 상대적으로 여성의 지위가 높았던 시기로 알려져 있다. 혼인한 뒤 처갓집으로 들어가 사는 고려의 혼인제도와 재산의 균분상속 그리고 여성도 호주가 될 수 있었다는 점 때문이다. 또한 고려에서는 이혼과 재혼역시 조선에 비해 자유로웠다. 하지만 이혼과 재혼이 자유로웠다는 사실이 여성의 지위가 높았음을 나타내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본 발제문에서는 이혼제도를 통해 여성의 지위에 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다.
2. 이혼제도
고려사에서 이혼은 혼인관계가 끊어지는 일반적인 의미의 이혼과 처를 내치는 것의 두 가지 형태로 보인다. 그러나 고려사(高麗史)는 어떤 경우에 이혼이 가능했는가에 대한 답을 해주지는 못했다. 따라서 이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사료에서 보이는 이혼 사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또 당률을 약간 활용하여 조금 더 효율적으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고려는 당률을 삭번취간(削飜取刊)하여 율을 제정하였다 하며, 형법지의 제 기사들은 대부분 당률을 모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고려의 형률은 당률 이외에 송률이나 원률의 영향도 받았으므로 당률이 곧 고려율이라거나 당률이 고려시대에 그대로 적용되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형법지 기사의 대부분이 당률에 근원함을 볼 때 당률은 누락된 고려율을 재구성하는데 도움은 줄 수 있을 것이다.
2-1. 법을 통해 살펴본 이혼제도
당률을 보면 이혼에는 화리(和離), 의절(義絶), 기처(棄妻)의 세 가지 형태가 있었다. 화리란 당사자의 합의에 의하여 이혼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예가 사료로 남아있기란 사실상 힘들다. 사료에는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것보다는 문제가 있어 처벌을 받았다거나 처벌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 등이 수록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려시대에 사료는 보이지는 않으나 이러한 유형의 이혼이 있었으리라 여겨진다.
의절이란 ‘의가 끊어지는 것’으로서 부부는 의로 합한 것인데 의가 끊어졌으니 헤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참고 자료
高麗史
高麗史節要
권순형, 고려의 혼인제와 여성의 삶, 혜안, 2006.
한국여성연구소 여성사연구실, 우리 여성의 역사, 청년사, 1999.
허흥식, 「고려의 女性의 지위와 역할」,한국사시민강좌 제15집, 일조각,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