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과 그의 의거
- 최초 등록일
- 2019.07.21
- 최종 저작일
- 20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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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1909년 10월 26일 일본 사회는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충격과 놀라움에 휩싸였다. 소위 ‘명치의 원훈’으로 추앙받던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 하얼빈 역에서 권총에 맞아 암살당했기 때문이다. 이토를 비롯한 여러 명의 수행원들도 중경상을 입었다는 사실과 현장에서 붙잡힌 ‘암살자’가 조선인 청년으로 판명되자 일본은 발칵 뒤집혔다. 조선인 청년의 이름은 ‘안중근’이었고, 이 사건은 후에 ‘안중근 의거’로 불리며 한국의 역사에 기록되었다.
안중근 의사 사후 100여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 두 사람은 일본과 조선에서 대조적으로 각각 영웅과 국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일본에서는 일본을 만든 원훈이자 근대 국가의 아버지이며 대정치가였던 이토 히로부미를 한국에서는 나의 조국을 식민지로 만든 원흉이자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에 앞장섰던 생각하는 반면, 당시 조선 교회는 가톨릭 신자였던 안중근의 의거를 단순한 ‘살인죄’로 단정하고, 안중근의 신앙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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