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농민반란의 배경
1) 사회경제적 배경
(1) 세력 별 토지소유의 집중화 현상
(2) 농민에 대한 수취의 가혹함
(3) 자연재해로 인한 흉년과 기근이 심하여 지면서 농민의 유망이 일반화
(4) 귀족의 사치와 향락생활, 현실인식의 안이함
2) 정치적 배경
3) 사상적 배경: 말세의식
2. 신라 하대 농민반란의 양상
1) 중앙귀족의 지방반란
2) 지방민에 의한 농민반란
3) 진성여왕 3년(889)의 농민반란 이후 당시의 사회상
3. 후삼국의 정립
1) 후백제
(1) 견훤의 신분
(2) 견훤의 자립
(3) 후백제 건국
(4) 후백제의 발전 - 영토의 확대
(5) 후백제의 몰락
2) 후고구려(태봉, 泰封)
(1) 궁예의 신분
(2) 궁예의 세력형성과정
(3) 궁예의 지지세력
(4) 반궁예세력
3) 고려의 건국
(1) 왕건과 궁예의 관계
(2) 궁예의 왕건 시중임명 - 순종, 협력과 갈등
(3) 왕건의 궁예축출
(4) 궁예말년 정변의 의의
본문내용
1. 농민반란의 배경
1) 사회경제적 배경
(1) 세력 별 토지소유의 집중화 현상
① 귀족세력 : 자신의 정치력 강화와 사병의 양성을 위한 경제력 확보를 위해 토지를 소유했다. 신당서 신라전에는 “재상가에는 녹이 끊이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지증대사가 전장 500여 결을 소유한 사실도 이를 뒷받침한다.
② 사원세력 : 사원세력 또한 대규모 토지를 소유하였고, 왕실의 사원에 토지를 기증하였다(효소왕의 백율사에 토지 1만 경 기증, 애장왕의 해인사 토지 2500결 희사). 왕실 이외에도 귀족과 빈한한 백성까지도 사원에 재산을 기증하였고, 사원은 기증된 재산과 토지를 토대로 고리대사업을 하여 토지를 겸병하거나 매입하였다. 해인사는 헌강왕 6년(880년), 8년(882년), 11년(885년), 진성여왕 5년(891년), 8년(894년)에 전장을 사들인 전권의 기록이 남아 있으며 개선사(전남 담양)도 891년에 전을 매입한 기록이 있다. 사원의 전장은 전국 각지에 산재해 있으며 사원은 지장(知莊)을 파견하여 관리하였다.
③ 부호농민 : 그 숫자가 많지 않을 것이나 토지 소유 규모를 확대하는 추세에 있었다.
(2) 농민에 대한 수취의 가혹함
신라 정부는 농민들로부터 조세 징수, 역역(力役) 징발, 공부 징수를 위하여 촌락에 대한 세밀한 조사를 실시하여 촌락문서를 작성하였다. 3년마다 작성되는 촌락문서에 의거하여 촌락단위로 역역과 병역을 징발하고 조세 공물을 징수하였다. 한편 신라 하대에 들어와 귀족들의 왕위계승을 위한 권력투쟁으로 인해 정부의 지방민에 대한 통제가 느슨하게 되었을 것이며 이때 전장을 확대한 귀족이나 사원은 농민에 대한 수취를 보다 강화시켜 나갔을 것이다.
(3) 자연재해로 인한 흉년과 기근이 심하여 지면서 농민의 유망이 일반화
농민의 유망은 어느 한곳에서만 발생한 것이 아니라 전국적인 현상이었다. 삼국사기 궁예전에 “신라가 말년에 쇠미하여지자 정치가 어지럽고 백성들이 흩어졌다.”는 기록이 있고, 삼국유사 견훤 항목에는 “기강은 문란해지고 게다가 기근이 곁들어 백성들이 유리하고 도적들이 벌떼와 같이 일어났다.”는 기록이 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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