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민란
- 최초 등록일
- 2019.05.22
- 최종 저작일
- 20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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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19세기 진주의 상황
1) 경제적 상황
2) 사회적 상황
2. 민란의 전개
1) 민란의 주도자들
2) 준비 과정
3) 진행 과정
3. 결과
본문내용
지리산 동쪽에 자리 잡은 진주는 경상우도에서는 가장 큰 읍이다. 목이 설치되어 정 3품의 목사가 파견되었고 우병영도 이곳에 있어서 비중이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주위에 큰 산과 강이 펼쳐져 있어 형세가 영남 제일이라고 일컬어졌다.
진주는 19세기 초의 기록에 의하면 70여 개의 면에 걸쳐 15,000여 호에 71,000여명의 인구가 거주하였다. 또 읍내장·반성장·소촌장·수곡장·덕산장 등 13개의 장이 있어 여러 가지 곡류와 면포·마포·명주·저포 등의 가내 수공품과 유기·철물 등의 전문적인 수공업제품 등이 거래되었다. 특히 진주는 조선 제일의 면포 생산지였고 누에치기도 매우 성했다.
18, 19세기에 들면서 환곡이 진주의 재정운용에서 특히 중요한 재원으로 등장했다. 진주는 읍의 규모가 컸으므로 이에 비례하여 환총(還摠)도 매우 많은 편이었다. 대체로 각곡 6~7만석, 쌀로 환산한다면 4만석 정도였다. 이와 같은 환곡 문제 때문에 민란 이전부터 농민들의 반발은 있었다.
조선시대의 법에는 백성들이 억울한 일이 있으면 거주하는 관아에 소장을 올려 호소할 수 있었고, 여기서 해결되지 않으면 상급 관아에 제소할 수 있었다. 즉, 지방 관아에 소장을 올려 들어주지 않으면 감영에 호소하고, 감영에 상소하여 들어주지 않으면 서울에 비변사에 호소하고, 그래도 들어주지 않으면 꽹과리나 징을 치며 왕에게 호소할 수 있었다. 진주민들도 문제를 시정하기 위하여 법에 따라 호소하였다. 1849년에는 박수익 등이 10년 사이에 환곡의 양이 5만석에서 15만 석으로 늘어나 빈호가 감당할 수 없다며 격쟁의 방법으로 호소했다.
1855년부터 포흠을 채우려는 목적으로 결렴이 행해졌는데, 이 때문에 농민들이 다시 저항했다. 관의 용도를 위해 민결에 결당 2냥씩 거두었는데, 이 또한 처음에는 1년에 한 차례씩이었으나 최근에는 몇 개월간 잇달아 거두었다고 한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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