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궁에 대해 감상문
- 최초 등록일
- 2019.03.15
- 최종 저작일
- 2019.03
- 7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2,000원
소개글
주제 : 경희궁에 대한 감상문
문화와 유적이나 유물을 감상하고서 보고서를 제출, 설명 및 느낀점, 생각
목차
Ⅰ. 경희궁에 대하여
Ⅱ. 경희궁을 방문하게 된 동기와 첫 느낌.
Ⅲ. 경희궁의 시작, 흥화문
Ⅳ. 숭정전의 정문, 숭정문
Ⅴ. 정전, 숭정전
Ⅵ. 편전, 자정전
Ⅶ. 감상문을 마치며
본문내용
사적 271호로 지정된 경희궁은 조선후기의 이궁이었다. 1617년(광해군 9)부터 짓기 시작하여 1623년(광해군 15)에 완성되었다. 경희궁이 들어서기 전, 본래 이곳에는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군의 집이 있었는데, 이곳에 왕기가 서려있다는 이야기가 있어 그 터를 몰수하고 궁궐을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처음 경희궁의 명칭은 경덕궁이었으나 원종의 시호인 ‘경덕’과 같은 발음이라 하여 1760년(영조 36)에 경희궁으로 변경되었다.
경희궁은 도성의 서쪽에 있다고 하여 서궐이라고도 불렀는데 이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합하여 동궐이라고 불렀던 것과는 대비되는 별칭이다.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불탄 후 대원군이 중건하기 전까지는 동궐인 창덕궁과 창경궁이 법궁이 되었고, 서궐인 경희궁이 이궁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인조 이후 철종에 이르기까지 10대에 걸쳐 임금들이 경희궁을 이궁으로 사용하였는데, 특히 영조는 치세의 절반을 경희궁에서 보냈다고 한다.
경희궁에는 정전인 숭정전을 비롯하여 편전인 자정전, 침전인 융복전, 최상전 등 10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들이 있었다. 하지만 대원군이 경복궁을 증건 하면서 경희궁에 있던 건물의 상당수가 옮겨 갔으며, 특히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점하면서 경희궁은 본격적인 수난을 맞이하였다. 1910년 일본인을 위한 학교인 경성중학교(지금의 서울 고등학교)가 들어서면서 숭정전 등 경희궁에 남아있던 중요한 전각들이 대부분 헐려 나갔고, 그 면적도 절반 정도로 축소되었다. 이로 인하여 경희궁은 궁궐의 모습을 읽어버렸다. 1987년 서울고등학교가 강남으로 이전한 뒤 경희궁은 공원으로 가꾸어졌다. 공원 내에는 서울시립미술과, 산책길 등이 있고 신라호텔로 옮겼던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이 다시 제자리에 옮겨졌으며, 정전인 숭정전의 복원작업이 1994년 11월에 완료하고, 서울시에서는 2002년부터 시민들에게 공개하기 시작하였다.
참고 자료
홍석주(2009). 광해군 대의 경덕궁(경희궁) 창건. 서울학연구, 34.
조재모(2004). 조성왕실의 정침 개념과 변동. 대한건축학회지, 20(6).
김정미·경세진·조재모(2012). 경사지형 활용의 관점에서 살펴본 경희궁의 배치에 관한 연구. 대한건축학회지, 31(1).
김민선(2016). 조선시대 서궐 경희궁의 궁원구성에 관한 연구. 전남대학교, 석사학위논문.
서울특별시 홈페이지. (http://opengov.seoul.go.kr/sanction/338482)
경희궁 공식 홈페이지 (http://www.cgcm.go.kr/GHP_HOME/jsp/MM00/main.jsp)
한겨레(2004. 11.9.). ‘비운의 궁’ 경희궁 복원중단 ‘비운’. (http://legacy.www.hani.co.kr/section-005000000/2004/11/00500000020041109172729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