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사회복지 역사를 바탕으로 현재 우리나라 사회문제와 사회복지적 해결방안을 논하시오.
- 최초 등록일
- 2016.11.28
- 최종 저작일
- 20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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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한국 사회복지의 역사
2. 현재 우리나라 사회문제와 사회복지적 해결방안
3. 결론
본문내용
1. 한국 사회복지의 역사
한국 최초의 근대적 사회복지사업은 메스트르 신부의 성영회 사업이다. 이는 오늘날의 ‘아동위탁보호사업’으로 볼 수 있다. 치료적인 면보다 예방적인 면에 치중하고, 조직적․지속적인 사업이었으며, 물질적인 구제보다 자조자립을 돕는 활동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후 천주교는 1880년 버림받은 어린이들을 보살피는 위탁보호를 시행하였고, 그 후 서울 곤당골에는 영해원이 설립되어 고아들을 보육하였다. 1885년 3월 15일 곤당골에는 한국 최초의 고아원과 양로원인 천주교고아원이 개설된다.
또한 1888년 9월 아동복지사업을 목적으로 한국에 진출한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는 1888년 9월 8일 천주교고아원을 인수한다. 1915년에는 고아원 운영비를 조달하고자, 한국 최초의 자선바자를 열기도 했다. 1910년 조선 총독부가 제생원을 세웠고, 1929년 조선사회사업가협회가 창설되었다. 같은 해 조선귀족보호시설 재단법인 창복회가 설립되었다. 1933년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조선사회사업개요’에는 전국에 당시의 양로원 수가 9개, 수용인원이 58명이라고 나온다. 1944년에는 ‘조선총독부 구호령’이 반포되어, 생활이 빈곤한 임산부와 13세 이하의 아동이 재가구호(원칙적) 또는 위탁구호 및 시설수용(예외적) 되었다.
광복을 맞이하고 6.25전쟁을 거치며 공공부조의 시도(1945-1950년대 말)가 진행되었다. 사회 전반의 혼란기, 이승만 정권은 반공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한 권위주의체제를 수립하였고 사회복지제도는 거의 도입되지 않았다. 민간 사회복지기관에 의한 전쟁난민에 대한 일시적 구호가 주로 이루어졌다. 고아와 기아를 위한 육아시설, 감화원과 양로원 등의 시설 수는 해방 후부터 1948년 3월 말까지 47개에서 127개로 증가하였다. 수용 인원 또한 2282명에서 7832명으로 급증했다. 1948년 제헌헌법은 생활부능력자에 대한 보호규정을 두어 국가의 공공부조를 통한 국민의 생존권보장을 명시하였으나, 실질적인 제도는 훨씬 뒤에 등장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