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과 17~18세기 토지제도의 문란
- 최초 등록일
- 2015.05.18
- 최종 저작일
- 20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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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사회경제사 A+ 레포트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임진왜란과 당시 사회
2. 토지겸병의 시작
ⅰ. 아문둔전제도의 발생
ⅱ. 궁방전제도의 발생
ⅲ. 양반 관료·지주들에 의한 토지겸병
3. 토지겸병의 팽창
ⅰ. 아문둔전의 팽창
ⅱ. 궁방전의 팽창
ⅲ. 양반관료·지주들에 의한 토지겸병의 팽창
Ⅲ. 결론
본문내용
Ⅰ. 서론
전근대 백성의 대부분은 농민이었다. 그것은 곧 토지가 매우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뜻하지만, 당시 토지의 중요성은 현재와는 다른 방식으로 강조되었다. 다시 말하면, 현재 대부분의 국민은 농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토지는 여전히 중요하다. 하지만 이러한 중요성은 전근대 토지의 중요성과는 다른데, 전근대 사회에서 토지란 생계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것이었다. 토지생산물은 대부분 주식의 재료로 이용되었고, 이는 비교적 상업이 발달하지 않았던 조선이라는 국가가 농사를 강조하였던 것과 깊은 연관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토지의 중요성을 바탕으로 전근대 국가는, 국가의 운영에 있어서 토지에 대한 정책을 최우선시 해야 했다. 국가에 의한 토지의 장악은 귀족 세력을 중앙으로 귀속시키고 민심을 얻을 수 있는 바탕이 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토지제도에 대해 이해하는 것은 민들을 지배하는 그 국가의 속성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조선의 토지제도는 크게 과전법, 직전법, 관수관급제, 녹봉으로 이어진다고 할 수 있다. 이 시대의 토지제도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이러한 커다란 축을 살피는 것이 훨씬 효율적일지 모른다. 하지만 본고는 토지제도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조선조 역사상 단기간에 가장 큰 변화를 유도한 사건 중의 하나인 임진왜란을 이용하려 한다. 그리고 임진왜란 시대의 토지제도, 그 중에서도 아문·궁방·양반지주에 의한 토지겸병에 대해 알아볼 것이다. 여기서 토지겸병이란 남의 땅을 강제로 빼앗아 자신의 토지를 넓히는 것을 말한다.
임진왜란은 사회 전반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한반도에 자리 잡은 우리 조상들은 수도 없이 많은 외침을 겪었고, 분명 그 중에는 임진왜란 보다 규모가 큰 전쟁들도 존재할 것이다. 즉, 임진왜란만이 사회의 변화를 주도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토지제도의 변화를 가져온 더 큰 사건들이 많기 때문에, 임진왜란을 축으로 토지제도의 변화를 이해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수 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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