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주요사건
- 최초 등록일
- 2014.11.22
- 최종 저작일
- 20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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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보천보전투
2. 8월 종파사건
3. 중소분쟁과 자주노선
4. 갑산파사건
5. 유일체제
6. 6군단 사건
7. 심화조 사건
8. 2002년 7.1 경제관리개선조치
본문내용
●보천보전투
1937년 6월 4일 만주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동북항일연군은 김일성 지휘 하에 백두산 지구 혜산 부근 마을인 보천보를 습격하였다. 주요기관들을 공격하고 조선광복회 10대 강령 등의 격문을 살포하였으며 이로 인해 일본경찰 7명이 사망하였다고 전해진다. 일제의 탄압이 극심했던 시기에 일어난 이 사건은 동아일보에서 두 번의 호외를 발행하여 보도하였으며 조선인의 사기를 크게 진작시켰으며 북한 또한 이 전투를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사 중 가장 큰 업적으로 여기며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있다. 비록 보천보가 매우 작은 마을이며 동명이인의 김일성이 참가한 전투라는 설도 있지만 보천보전투는 김일성이라는 이름을 세상에 널리 알리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8월 종파사건
1956년 8월 김일성을 합법적 방법으로 당위원장에서 해임시키기 위해 반김일성 세력이 김일성에 도전한 북한 최대 권력투쟁이다. 이는 한국전쟁 후 북한에 군대를 주둔시키며 영향력을 높이고 있던 중국과 가까웠던 연안파와 전통적인 사회주의 종주국인 소련과 가까웠던 소련파가 합작해 김일성에 대항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8월 종파사건의 계기로는 전후 복구를 둘러싸고 김일성이 내놓은 중공업 우선과 농업, 경공업의 동시발전이라는 정책노선에 대한 대립을 들 수 있다. 8월 30일 전원회의에서 윤공흠을 비롯한 연안파와 소련파들이 당 독재에 대해 공개비판을 하였으나 김일성 측근들이 이미 핵심 포스트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비판세력들은 반당종파행위로 몰려 출당되고 윤공흠 등은 중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하지만 김일성을 견제하고자 했던 중국과 소련은 각각 팽덕회와 미코얀을 평양으로 파견하여 8월 전원회의의 결정을 번복할 것을 종용한다. 당시 북한은 중국과 소련의 거액의 원조를 약속받고 있던 상황이기 때문에 이를 일시 수용하게 되고 출당자들을 복당시키게 된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