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전범재판의 한계
- 최초 등록일
- 2014.04.02
- 최종 저작일
- 2011.11
- 5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500원
목차
1. 동경전범재판의 준비과정
2. 동경전범재판의 진행
3. 동경전범재판의 한계점
본문내용
동경전범재판의 한계
박원순 현 서울시장은 변호사로 활동하던 시절에 '이 재판의 과정과 내용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일제의 침략정책은 말할 것도 없고 전후의 처리과정에 대한 정확한 이해, 더 나아가 오늘날 일본인들의 가슴속에 깊이 남아 있는 군국주의 천황제도에 대한 이해를 제대로 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도쿄전범재판은 이 땅에서 영원히 역사의 '블랙홀'로 사라져버렸다'라고 동경전범재판(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 대하여 말한 적이 있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우리나라는 우리 국민들이 일본에게 가지는 반일감정의 근본적 원인이 되는 식민 지배시절부터 2차 세계대전에 이르는 과정들에 대하여 정당하게 죄를 물어야 할 피해국이었다. 하지만 이들을 단죄하는 역할에 참여하지 못하였고 또한 동경전범재판에는 많은 한계가 있었다는 점 등 자세한 내막들을 역사학자나 특별히 관심이 있는 사람을 제외한 대분의 국민들을 알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일련의 사건과 자세한 과정을 알지 못한 뒤 단지 비난만 하는 것은 정당할 수 없기 때문에 정확한 사실을 알게 된 후에 정당한 비판을 해야 옳을 것이다.
2차 세계대전 말기 무렵 미국, 영국, 중국의 대표가 참여한 포츠담 회의에선 전후 처리방침에 대하여 13개의 항목들을 선언했다. 그 중 10번째 항목의 내용은 전쟁범죄자들을 처벌하자는 내용이었다. 이에 따라 2차 세계대전 종결 후 세계 각처에서는 전범재판이 열리게 되었다. 특히 2차 세계대전의 주범이라고 할 수 있는 독일과 일본에서는 각각 A급 전범들을 처리하는 뉘렌베르크 전범재판, 동경전범재판이 열리게 되었다. 물론 두 개의 재판 모두에서 한계점들이 생겨난 것은 사실이다.
참고 자료
황허이, 역 백은영,『도쿄대재판』, 예담, 1998년 8월 31일
박원순, <동경전범재판의 시작과 끝>, 한국현대사연구회, 199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