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위대한 지도자
- 최초 등록일
- 2003.05.23
- 최종 저작일
- 2003.05
- 6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000원
목차
1. 서론
2. 본론
1)프랑스의 봉건체제
2)프로이센의 위치
3)프로이센
4)프랑스 프로이센 전쟁
5)프로이센 비판
6)독특한 견해
7)나폴레옹에 대한 견해
3. 결론
본문내용
Ⅰ. 서론
18-19세기에서 중요한 역사적 사건을 꼽으라면 프랑스혁명이 빠질 수 없다. 프랑스는 그 시대에 유럽대륙에서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이 시기 프랑스는 구제도인 신분제도를 유지하였다. 그래서 사회구조는 귀족적이고 봉건적인 성격을 지녔다. 평민들은 구제도의 모순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상공업을 통해서 성장한 그들은 시민의식을 키워나가기 시작했으며 계몽사상의 영향을 받으면서 혁명의 시초가 된 것이다.
프랑스의 왕정은 ‘절대적’이라고 불렸는데 이는 ‘무조건적’이며 ‘무제한적’이라는 의미이다. 이론적으로는 모든 것이 왕에게서 나와서 왕에게로 돌아간다. 왕은 단지 신에게만 보고할 의무를 갖게 된다. 법률제정권한은 오직 왕에게만 속하며, 모든 정의는 왕의 이름으로 행해진다. 프랑스의 군주제는 국왕에게 막강한 권력을 보장했다.
그러나 개혁이 필요한 부분들이나 개혁 주체에 대한 지배적인 생각은 군주제가 위로부터 스스로 개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군주제는 그럴 능력이 없었다. 후에 프랑스가 재정상의 위기를 겪게 되자 여러 가지 개혁을 단행하였으나 실패하자 특권 계급에 세금을 부여하게 되고 귀족들은 이 개혁안을 거부하고 대신 1614년이래 소집된 일이 없는 성직자, 귀족, 제3신분으로 이루어진 삼부회를 소집할 것을 요구했다.
이들은 국왕에게 새로운 헌법의 제정을 요구하는 개가를 올리고 국왕이 수락할 때까지 흩어지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다. 왕은 이에 승낙하는 듯 하였으나 바로 이들을 해산할 군대를 조직하여 왕이 음모를 꾸몄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이 때 농민들은 공포에 질려있었고 1789년 군중들은 왕의 폭정을 상징하는 바스티유를 점거하였다. 이 사건은 폭동이 아니라 혁명이었다. 국왕은 이 때 다시 한번 굴복해야 했다. 파리를 방문한 그는 국민주권을 승인한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농민을 진정시킬 수 있는 방법이 하나뿐임을 깨닫고 봉건적 체제와 구조세법을 폐지한다는 법령을 공포하였다. 그 다음에는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을 채택해 자유, 평등, 저항권, 사유재산권 등을 천명하였다.
참고 자료
「나폴레옹」- 루드비히
「프랑스 혁명」-블릐슈
「프랑스 혁명사」알베르트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고봉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