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파에 관하여..
- 최초 등록일
- 2003.05.11
- 최종 저작일
- 20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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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에른스트 루드비히 키르히너
에리히 헥켈
에밀 놀데
본문내용
1905년 드레스덴에서 등장한 "다리파"에는 키르히너와 헤켈, 슈미트-로트루프가 속해 있었으며 블레일도 일시적으로 이에 참여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건축을 그만두고 그림을 그리게 된 작가들이다. 이러한 현상은 그 자체로서도 예사롭지 않은 것이었는데, 당시에는 이와 정반대의 현상이 유행하였기 때문이다. 즉 미술의 사치스러움을 지양하고 유용한 물건을 디자인하는, 목적이 뚜렷한 활동으로 전향하는 현상이 지배적이었다. 그들중 키르히너만이 짧은 기간 동안 미술교육을 받았다. 1905년에 그와 그의 동료들이 현대 미술에 대하여 무엇을 알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들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들의 선언문은 키르히너가 초안을 잡았을 것으로 추측되며 그가 이를 목판으로 만든 것은 분명하다. 이 선언문에는 젊은이, 자신을 적나라하게 표현하는 모든 사람, 기존의 것에 대한 반항등이 언급되어 있다.
"진보에 대하여, 그리고 창조적인 동시에 예민한 감수성을 지닌 새세대에 대하여 신념을 가지면서, 우리는 모든 젊은이들을 부른다. 미래를 손에 쥐고 있는 젊은이로서 우리는 낡은 기존의 세력에 대항아혀 생활하고 일할 자유를 성취하고자 한다. 자신의 창조적 퉁동의 원천을 직접적을 가식없이 표현하는 모든 사람은 우리와 동참할 수 있다."
다리파가 자신들의 예술적 기반을 발견하는 데는 몇 년이 걸렸다. 그리고 이 기간동안 그들은 다른 미술가들이 무엇을 하고 있고 무엇을 이룩하였는지를 더욱 잘 알게 되었다. 그들은 반고흐, 인도의 동굴벽화, 고갱과 뭉크, 종교개혁기의 독일 미술, 특히 뒤러와 크라나흐에 대하여 알게 되었고, 야수파의 소식에도 접하게 되었다. 그러나 야수파 그림을 직접 보지는 못하였다. 그들은 체계적인 연구나 발전다계를 거치지는 않았으나. 모든 경험을 개방적으로 받아들였다. 소위 데카당이라고 불리웠던 19세기 말 파리의 예술가들과 유사하게, 키르히너와 그의 동료들은 예술가로서 예술가답게 살기를 원하였으며, 심지어는 예술작품을 제작하기보다 그렇게 살기를 더 바라기까지 하였다. 그리하여 그룹이 형성 되었다. 그들은 함께 가난한 생활을 하였는데 돈이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던 것같다. 그들은 자신들의 그림으로 방을 장식하였으며, 가구도 극히 원시적인 방법으로 손수 만들었다. 여자친구들이 모델이 되어주었고 태양과 젊은 혈기가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드레스덴 시기는 야수파의 영향을 받아 강렬한 원색, 구성의 영향을 보이지만 그다지 세인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러나 베를린시기에는 선이 딱딱하고 날카로워지며 화면구도도 복잡하게 변화되었다. 한편 중세미술을 독일미술 정통성으로 여기고 뒤러,크라나흐등에 주목하여 판화에 관심을 갖는다. 키르히너는 목판, 로틀루프는 석판,헤켈은 목각을 하였다.
1) 소재;
·주로 도시나 거리, 누드, 풍경 속의 누드, 카바레, 창녀와 고객 등 20세기에 생겨난 새 로운 도심의 소재들로 개인, 종교, 성, 군중 사회 속의 심리적 <font color=aaaaff>..</font>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