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중세사] 공녀 에 대하여
- 최초 등록일
- 2003.03.09
- 최종 저작일
- 2003.03
- 7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000원
목차
1. 중국과의 조공외교 관계
2. 공녀 요구의 목적
3. 공녀의 헌납 상황
4. 공녀의 선발과정
5. 공녀의 폐단과 기피 실태
6. 공녀 출발시의 참상
7. 공녀들이 끌려간 길
8. 공녀 중지 운동
9. 공녀의 운명
10. 기황후의 등장과 그 일족의 득세
11. 공녀로 혜택을 본 친족들
12. 고자의 헌납
13. 공녀의 영향
본문내용
삼국시대 이래로 한국과 중국과의 외교관계는 조공외교를 특징으로 하였다. 한·중간의 조공관계는 삼국시대 초기인 AD 1세기 이래로 조선시대 말기인 갑오개혁(1894) 때 약 2,000년 동안 지속되었다. 이러한 조공관계는 정치·경제·사회적으로 한국의 역대 왕조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 데, 과거 한국 측에서 경제적손실을 감수하면서까지 어찌 보면 굴욕적이라 할 조공관계를 오랫동안 유지해온 것은 무엇보다도 정치적 목적에 의한 것이었다. 즉 한국의 지배자들이 조공관계를 지속시킨 이유는 중국의 힘을 배경으로 하여 지배자로서의 위치를 유지하는 일종의 보장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즉 조공을 통해 정권유지의 안전판 역할을 중국측에게 기대하였던 것이다. 이에 조공관계를 통하여 중국의 선진문물을 수입할 수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그 부산물에 불과하였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조공관계에 따른 사대주의 내니 모화사상(慕華思想)의 심화가 한국의 정치적·문화적 독자성의 발전을 크게 저해한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여기에 공녀문제도 결국은 조공관계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공녀란 중국의 요구에 따라 보내어진 한국의 여자, 특히 처녀들을 뜻하는 것으로서 일종의 특수공물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기원 후 4세기부터인 데, 고구려와 신라에서 미녀를 보냈다는 기록이 나타나고 있으며 그 후로도 공녀의 헌납은 계속 이어져 고려 후기엔 원나라에, 조선 초기엔 명나라에, 그리고 조선 후기에는 청나라에 수많은 처녀를 보내야만 했다. 이렇기 이역만리 중구 땅으로 끌려간 처녀들은 고국의 부모·친척들을 그리워하며 평생을 황실의 궁녀나 중국 고관들의 처첩으로 지냈어야 했다. 이러한 공녀문제는 일제시대의 정신대 못지 않게 한국 여인들의 가슴을 멍들게 한 비극적이고 어두운 역사의 한 단면이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