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황제국체제 레포트
- 최초 등록일
- 2019.06.14
- 최종 저작일
- 2018.10
- 9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2,000원
* 본 문서(hwp)가 작성된 한글 프로그램 버전보다 낮은 한글 프로그램에서 열람할 경우 문서가 올바르게 표시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경우에는 최신패치가 되어 있는 2010 이상 버전이나 한글뷰어에서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본론
1. 고려의 황제국체제와 그 근거
2. 원간섭기 제후국체제로의 변화와 공민왕의 노력
3. 고려의 다원적 천하관
Ⅲ. 맺음말
본문내용
Ⅰ.머리말
500년 역사를 간직한 조선은 흔히 알려져 있듯이 ‘명(明’), ‘청(淸)’과 조공-책봉 관계였다. 조공(助工)은 전근대 동아시아의 국제관계에서 중국 주변국들이 정기적으로 중국에 사절을 보내 예물 등을 바친 행위이며..
<중 략>
Ⅱ.본론
1. 고려의 황제국체제와 그 근거
앞서 언급했듯이 고려는 대외적으로는 중국의 제후국, 대내적으로는 황제국인 외왕내제 체제였다. 대외적으로는 중국에 조공을 하고 중국 황제국의 제후왕으로서 책봉을 받았다. 하지만 고려가 대내적으로 황제국체제적인 요소들을 갖춘 것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이러한 중국의 속국으로서의 인식은 형식적인 면이 강했다고 볼 수 있다.
고려가 대내적으로 황제국체제를 지향한 그 근거들을 살펴보자. 첫 번째는 바로 고려 황제국 운영체제의 중심이라 볼 수 있는 ‘봉작(封爵)’제도이다. 봉작제도는 황제나 왕 밑의 왕족이나 공훈이 있는 신하들에게 작위를 수여하는 것으로서, 이 작위에는 크게 왕(王)으로 봉해주는 왕작(王爵)과 공·후·백·자·남(公․侯․伯․子․男)으로 봉해주는 5등작(等爵)이 있었다. 황제국체제에서는 왕작을 수여하나, 왕조국가에서는 왕이 왕을 수여할 수는 없기 때문에 왕작의 수여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중국에 조공을 하는 제후국으로서 고려는 기본적으로 왕족들에게 공작·후작·백작 등을 수여했는데 그들을 통칭하여 ‘제왕’(諸王)으로도 표현했다.
癸巳 命太子與諸王, 置酒東池樓, 召秀才崔應·李曙, 御室忠, 令賦東池尋勝詩, 各賜匹段.
계사 태자와 제왕(諸王)에게 명령하여 동지루(東池樓)에 잔치를 베풀게 하고, 수재(秀才)인 최응(崔應)과 이서(李曙), 종실(宗室) 왕충(王忠)을 불러 「동지심승시(東池尋勝詩)」를 짓도록 하고 그들에게 각각 필단(匹段)을 하사하였다.
고려사, 세가 권7, 문종 10년, 9월
또한 고려사를 보면 제왕들을 ‘친왕’, 그리고 후작을 ‘후왕’(侯王)이라고도 부른 기록이 존재한다.
참고 자료
김기덕, 「고려의 제왕제와 황제국체제」, 국사편찬위원회, 1997.
노명호, 「고려의 다원적 천하관과 해동천자」, 한국사연구, 1999.
박용운, 『고려시대사』, 일지사, 2015.
김인호 외 2인, 『미래를 여는 한국의 역사』,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