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리영희 선생의 기자시절을 저서와 관련 책을 통해 정리하고
이 시대의 기자들이 나아갈 방향과 언론이 취해야 할 자세등을
상세히 엮었습니다.
목차
Ⅰ. 서론 - 기자란
Ⅱ. 기자의 두 얼굴
Ⅲ. 리영희의 기자인생
Ⅳ. 리영희가 한국 언론계에 남긴 것들
본문내용
기자는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각종 사고ㆍ사건, 정치ㆍ경제 소식, 생활 정보 등을 신문, 잡지, 라디오, TV, 인터넷 등을 통해 일반인에게 신속하게 알려주는 사람이다1). 해외의 경우, 전설적인 종군기자 ‘로버트 카파’나 워터게이트 사건을 보도한 ‘칼 번스타인’ 기자등이 대표적이다. 한국의 경우, 눈을 맞는 모습이 화제가 됐던 KBS 박대기 기자나 팟캐스트 방송 ‘나는 꼼수다’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시사IN 주진우 기자, 촌철살인의 클로징 멘트로 시청자들을 사로잡은 MBC 신경민 기자처럼 수많은 기자가 각자의 영역에서 발로 뛰고 있다.
<중 략>
리영희는 1964년 10월에 <조선일보> 외신부로 직장을 옮겼다. 합동통신 시절의 유명세 때문에 ‘스카우트’를 받게 된 것이다. 이때는 박정희 정권의 굴욕적인 한·일 회담 추진으로 국내 정세가 어수선한 시기였다. 궁지에 몰린 박정희 정권은 언론 탄압의 강도를 더했다. <경향신문> 발행인과 기자를 구속하고, 같은 날 <동아일보>간부 6명을 반공법 등 위반혐의로 구속했다. 또한 ‘언론윤리위원회법안’을 만들어 국회에서 이를 반대하는 야당이 불참한 가운데 일방적으로 처리했다. 이에 적응해 정치부 기자들이 권력의 해바라기가 되어가는 <조선일보>에서 리영희는 그들과 다른 길을 걸었다.
리영희의 투철한 기자정신은 곧 필화사건으로 이어졌다. 리영희는 국제정세를 분석해 <조선일보> 1964년 11월 21일자에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제안 준비>라는 제목의 기사를 썼다. “남북한의 유엔 동시가입 안건을 아시아·아프리카 외상회의에서 검토 중”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 날 새벽 리영희는 네명의 과한에게 붙잡혀서 중구 저동의 쌍용빌딩 맞은편에 있는 일본식 건물로 끌려갔다. 국내법으로 ‘적성국가 및 반국가단체 고무찬양죄’가 적용된다는 논리였다. 그 악명높은 반공법 제 4조 2항이다. 리영희는 비밀장소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그는 두 달 동안 감옥생활을 하다가 불구속으로 석방됐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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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6월 28일자 한겨레 21, “사장님 그래도 됩니까?”
1989년 1월 1일자 한겨레신문
1988년 5월 15일자 한겨레신문
1988년 9월 15일자 한겨레신문
2011년 10월 5일자 경향신문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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