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근대사]중일 전쟁의 시작
- 최초 등록일
- 2002.12.05
- 최종 저작일
- 20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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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1937년은 그 초부터 <일치항일>의 분위기가 전국적으로 흘러넘쳐 전면적인 항일전이 곧 다가올 것이란 예감이 중국대륙을 사로잡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바로 그해 1937년 7월 7일, 북경교외 노구교蘆溝橋에서 터진 총성이 마침내 중·일 전면전쟁의 개시를 알려준 것이었다.
목차
1.장개석 정권의 확립
2. 민중의 대일항전
3. 서안사건과 항일민족통일전선
본문내용
동북에서 전화(戰火)가 일단 잦아진 1932~1933년 무렵부터 노구교(蘆溝橋)사건 (1937년7월 7일)직전의 1936~7년 동안에 장개석 정권은 바야흐로 그 확립기를 맞이하였다고 할 수 있다.
-장개석은 무엇보다 군사력의 충실에 온 힘을 쏟았다. 그들은 구미 열강에서 신식무기를 구입하고 점차 장비를 통일시켜 이른바 장개석 직계의 중앙군이라 불리는 군대를 설치했다. 무력이란 점에서 보면 그는 분명히 중국 최고의 실력자의 위치를 차지하고있었다.
-아울러 장개석은 중국의 통일, 근대화를 위한 구체적인 시책의 하나로 전국의 교통망의 정비를 꾀해 특히 철도와 자동차 도로의 건설에 손을 댔다. 그는 특히 화남지역 철도건설 5개년 계획을 발표하여 1925년부터 1936년 사이에 그 총 연장은 8천km에서 1만 3천km로 뻗어 나갔다. 그 결과 월한선(漢線)이 뚫려 이미 부설되어 있던 경한선(京漢線)과 연결되니 북경-한구-광주를 잇는 말하자면 중국 대륙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대간선(大幹線)이 개통되었다. 철도와 더불어 정력적으로 건설된 것은 공로(公路) 혹은 관영포장 자동차로였다. 이렇듯 장정권은 기본적으로 교통망의 정비를 급속히 진전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교통망의 정비에는 군사적인 동기가 강력하게 작용되었다고 하겠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