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일본에 기독교가 전래된 것부터 금압된 것까지를 시기별로 나누어 소개했습니다.
목차
1. 서론
2. 본론
2-1. 일본과 기독교의 만남(1549)
2-2. 기독교의 성장
2-3. 기독교 금지와 탄압
2-3-1.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선린 정책
2-3-2.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선교사 추방령(1587)과 그 배경
2-3-3.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기독교 탄압
2-3-4.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기독교 탄압
2-3-5. 시마바라의 난
3. 결론
4. 참고문헌
본문내용
2-1. 일본과 기독교의 만남(1549)
네스토리안 기독교(Nestorian Christianity)와의 접촉설 등의 일본에 기독교 전래에 대한 주장이 있지만, 대부분의 역사가들이 인정하는 공식적인 첫 기독교의 전래는 1549년 8월 15일 프란시스코 자비에르(Francisco de Xavier)를 포함한 예수회 신부와 세 명의 일본인이 가고시마에 도착한 것으로 본다. 그들이 도착하자 당시 사츠마의 영주인 시마즈 타카히사가 자신의 영지에서의 경제적 이익을 목적으로 영지 내에서 자유롭게 포교를 허락하며 맞이해 주었다. 이후 자비에르는 포교 허가를 위해 일본의 중심 교토에 들어갔지만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변방이라고 할 수 있는 쥬고쿠, 규슈 각지에 다이묘들의 보호를 받아 포교를 시작했다.
2-2. 기독교의 성장
당시 다이묘의 대부분의 영주들은 기독교 포교에 대해 우호적이었다. 포르투갈 상선의 왕래를 통한 경제적 이득의 확보와 지속적인 내전 상황에서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는 유럽 무기를 선점하기 위한 경쟁 때문이었다. 기독교는 규슈를 중점으로 번성하여 교토와 오사카로 번져나갔다. 또한, 당시 일본 전역을 장악하고 있던 오다 노부나가는 1569년부터 루이스 프로이스 선교사를 포함한 예수회 선교사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고 불교와의 대항관계와 남만문화에 대한 관심으로 기독교를 보호했다. 그 결과, 자비에르가 일본에 도착한 후 32년 동안 선교사들이 로마 예수회 대표에 해마다 보낸 보고서에 의하면, 교회가 200개, 100명이 넘는 외국인과 일본인 직원이 근무하는 병원이 20개, 또 개종자가 15만 여 명이었다.
2-3. 기독교 금지와 탄압
2-3-1.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선린 정책
158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정권을 잡고 얼마 동안 그는 예수회에 우호적이어서 기독교를 보호하고 무역을 활발하게 하는 정책을 취했다. 집권 초기 약 5년 동안 선교사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고 그의 핵심 참모 가운데 기독교인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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