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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 무(巫)에 대한 음사금지책(淫祀禁止策)

*호*
최초 등록일
2006.10.10
최종 저작일
2006.01
6페이지/한글파일 한컴오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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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무속은 종교직능자(宗敎職能者)인 무당(巫堂)이 신과 인간의 세계를 교통하면서 단골의 문제를 풀어내는 종교현상이다. 이러한 무속의 종교적 기능에 대하여 학계의 시각은 많은 편차를 보이고 있다. 먼저 무속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한말 일제하의 서양인 기독교 선교사들의 효율적인 선교정책의 일환에서 비롯되었다. 그 결과 조선은 무속뿐만 아니라 다양한 민속신앙으로 인해서 근대사회로 발전하기 어렵다고 인식하고, 이에 조선의 근대화와 선교를 위해서 무속을 소멸하고 극복해야할 대상으로 간주하였다. 그리고 일본의 학자들은 식민정책의 일환으로 무속을 연구하였다. 이들은 조선 문화의 보편성을 강조하고 조선의 고유성을 은닉하려는 의도에서 시도되었다. 결과적으로 이 양자의 입장은 무속의 사회․종교적인 기능과 역할을 무시하고 나아가 전통문화 전체를 불신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이와는 반대로 무속을 ‘민족문화의 원류(原流)’라고 생각하는 입장이 있다. 이처럼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인식은 서양인 선교사와 일본 학자에게 자극을 받은 민족주의 계열의 연구자로부터 비롯되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은 최남선, 이능화 등으로 이들은 일제통치 아래에서 망각되어 가는 민족혼을 일깨우기 위해서 한국문화의 특질을 되살리고자 하였다. 이에 그 일환으로 무속을 연구하였다. 그리하여 무속이 한국의 역사와 함께 존재하였던 민중종교이며, 민족문화의 원류라고 파악하였다.
이처럼 긍정적, 부정적인 입장을 바탕으로 한 무속연구는 해방 이후에도 민속학, 종교학, 문화인류학 등의 여러 학문의 측면에서 다양하게 이루어졌다. 최근에는 현존 무속에 대한 실능(實能)뿐만 아니라 역사상의 무속에 대한 종합적인 이해를 위해서 역사학적 접근이 시도되고 있다.
이글에서는 조선전기의 무속을 살펴보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조선전기는 고려시대 이래의 불교․도교․무속 그리고 여러 민속신앙과 그에 따른 생활관습을 음사(淫祀)라고 규정하고, 그것을 주자학에 입각하여 개혁하려고 한시기로 파악하고 있다. 이와 같은 입장을 견지하여 당시 위정자들이 음사로 규정, 여러 사지 제약을 가한 한민족 고유의 샤머니즘 신앙을 금지시킨 배경과 금지의 법적, 사회적 규범, 그리고 이 신앙이 그토록 강한 규제 속에서 잔존될 수 있었던 여러 가지 여건을 살펴보려 한다.

목차

1. 머리말

2. 조선전기의 무(巫)

3. 조선전기 음사금지(淫祀禁止)의 배경
1) 유교(儒敎)의 유입
2) 경제적 배경
3) 사회적 배경

4. 음사금지책(淫祀禁止策)
1) 무당의 성외축출(城外逐出)
2) 무세징수(巫稅徵收)
3) 단골의 탄압

5. 음사금지(淫祀禁止)의 한계
1) 무(巫)에 대한 금지 정책의 비효율성
2) 농경사회 속의 무속신앙

6. 맺음말

본문내용

한국고대사에 있어서 무(巫)의 정확한 실체는 아직 제대로 파악되어 있지 않지만 그 초기는 대개 제정일치(祭政一致)의 시기로서 무당이 부족 내지 부족연맹의 장(長) 역할을 하였다. 이런 초기의 국가에서는 매년 대개 추수가 끝난 후, 국가적 제천의식을 거행하곤 했다. 이런 제의는 당시 동시에 정치적 통치자였던 무당에 의해 주재되었다. 이 외에도 무당은 산천제(山川祭), 시조제(始祖祭) 같은 제의나 치병을 책임지기도 하였다.
기원전 1세기경 고구려, 백제, 신라 세 나라가 형성되고 이들은 3세기에서 5세기 사이에 왕권의 강화를 통하여 전제적인 사회로 발전하여 갔다. 왕들은 이제 한 무리의 무당을 나라 무당(國巫堂)으로 삼고, 이들 무당은 왕에게 점복가, 사제자, 또는 치병자로서 봉사하였다. 그러나 삼국시대에 그 세 나라가 국가의 틀을 잡아가는 과정에서 무당은 그들의 정치적 권력을 상실하였다. 여기서 나라무당과 보통 무당의 분화가 나타나게 된다.
신라말기의 혼란을 수습하고 권력을 계승한 고려왕조는 겉보기에 마치 불교국가처럼 보였으나, 처음부터 실제 종교 혼합주의적 태도를 견지하였다. 한국 무의 분화는 고려조에 더욱 진전되었다. 나라 무당은 나라의 천신제나 시조제와 관련하여 계속해서 그들의 전통적 기능을 담당하였으며, 민간에서의 무당은 그들만의 업(業)을 계속해 나갔다. 그러나 이러한 무의 기능이 불교나 도교에 의해 분담되게 된다. 나라 무당은 이제 그들의 수행에 관한 전래의 권리를 더 이상 전매적인 것으로 고집할 수 없게 되었다.
무당은 그런 상태로 고려말까지는 그래도 성업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왕조에 들어와서는 사정이 급변한다.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잡은 조선와조는 무당을 이제 천민의 하나로 확정지었던 것이다. 무(巫)는 더욱이 유가의 안목에서 보아 사회적으로 부정적인 면 때문에 유학자들의 강력한 비판을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무당들은 고려 왕조 말기에 수도에서 지방으로 축출되어진다. 이러한 사태의 진전으로 다른 종교들이 무(巫)를 그의 국가 종교적 역할에서 점차 몰아내고 그에 따라 무(巫)는 일반민중과 보다 밀접한 관계에 서게 된다.

참고 자료

조흥윤, 『巫 한국무의 역사와 현상』, 민속사, 1997
조흥윤, 『민족학종서 한국의 巫』, 점은사, 1983
김용운, 윤서석 외, 『한길 역사강좌 4 - 한국의 기층문화』, 한길사, 1987
김인회 외, 『한국무속 종학적 考察』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3
유동식, 『한국 모속의 歷史와 구조』, 연세대 출판부, 1975
최길성, 『한국무속론』, 형운출판사, 1981
최길성, 『한국무속의 이해』, 예전사, 1994
한영우, 『조선전기 社會思想硏究』, 지식산업사,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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