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가면극에 대한 전체적인 분석입니다.
목차
가면극의 기원과 형성과정
가면극의 구조와 구성 원리
Ⅰ. 가면극에서의 여성 - 봉산탈춤 미얄할미과장을 중심으로
Ⅱ. 가면극의 양반풍자
가면극의 소개와 가면의 종류
가면극의 주제와 사회 의식
본문내용
고대의 제의-신라의 연희- 고려의 산대잡극-이조의 산대도감극
산대극 기원설에 의하면 산처럼 높은 무대를 만들어 그 위에서 가무와 곡예, 또는 재담을 하는 산대희에서 산대극이 생겨났고, 산대극이 인조 때 일단 중단되고 다시 영조 이후 국가적인 행사로는 폐지되자 그 연희자들의 분산으로 각 지방의 가면극이 이루어졌다.
원래 나례는 섣달 그믐날 궁중과 민간에서 가면을 쓴 사람들이 일정한 도구를 가지고 주문을 외치면서 귀신을 쫓는 동작을 해, 묵은 해의 잡귀를 목라내던 의식이다. 그러던 것이 고려말에는 점차 나례에서 구역의식보다 잡희부(雜戱部)가 확대되면서 나례가 잡희인 나례희, 즉 나희로 인식되어 갔다. 조선시대에는 이러한 현상이 더욱 심해져서 본말이 전도된 느낌이 든다. 조선조 『문종실록(文宗實錄)』 즉위년 6월 10조에 의하면 중국의 사신을 영접할 때도 나를 쓴다고 되어있다. 이 때의 나는 구역의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나례에 동방되었던 잡희, 즉 나희를 가리킨다. 중국 사신의 영접에도 나례에서 연행하던 잡희인 나희를 그대로 가져와서 공연했기 때문에 나라고 한 것이다. 중국 사신을 영접할 때 연행하던 이러한 연희는 원래 일반적으로 산대희라고 부르던 것이다.
나례도감(조선시대에 종묘에 제사지낼 때나 외국 사신의 영접 및 기타 나례를 행하던 일을 맡아 관장하는 임시관청, 인조 때 페지, 그 후 관상감에서 이 일을 잠시 맡아 함. )관상도감 산대도감 같은 임시 관청에서관장하다가 인조 12년(1634)공의 폐지 이후 일반화 내지는 대중화 되어 차츰 민속놀이로 발전한 것으로 본다.
조선조에 들어 나례도감(儺禮都監) 또는 산대도감(山臺都監)이 관장하던 산대희는 나레, 나희, 산대나례, 산대잡희 등으로 그 명칭을 혼용했다. 그리고 중국 사신을 영접할 때, 나례의식 때, 왕의 신주를 종묘에 모실 때, 왕이 종묘에서 제사지낼 때, 왕이 문묘에 참배할 때, 왕의 각종 행차 때, 왕후의 잉태를 축하할 때, 지방장관 등의 환영 때, 각종 궁중잔치 때에 광범위하게 쓰였으며 그 종류도 다채로워졌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고려시대의 산대잡극이나 나례희의 내용과 크게 차이가 없었던 것 같다. 거의 정례적으로 매년 섣날 그믐날 밤에 거행되었으며, 역신을 쫓아내는 축역 외에 잡희인 나희가 공연되었다. 이러한 나희는 중국 사신의 영접행사와 조정의 각종 행사에 반드시 필요한 절차가 되었고, 조선 전기에는 국가 신흥의 기운과 함께 그 규모도 성대해졌다. 그러나 임진ㆍ병자 양란 뒤에 조선조가 쇠운에 접어들자 인조(仁祖, 1623~1649) 이후에는 나례의 규모도 축소되어 축역행사 정도로 그치고, 명ㆍ청의 교체 이후에는 숭명배청(崇明排淸)의 감정과 함께 청나라 사신을 영접할 때의 산대 시설도 열의가 감소되었다. 영조, 정조 때는 그나마 나희가 몇 번 거행되었으나, 그 이후 공의(公儀)로서의 나의는 정파되고 말았다.
참고 자료
假面劇의 兩班諷刺에 대하여 박진태
`한풀이`를 통해 일어나는 화해와 생명문화 - 봉산탈춤의 미얄할미 과장에 대한 여성신학적 해석을 중심으로, 최영실
http://www.hahoemask.co.kr/ 하회별신굿탈놀이보존회
http://www.kwanno.or.kr/ 중요무형문화제 제13호 강릉 단오제 관노가면극
한국 가면극과 그 주변문화, 전경욱, 월인출판사 2007
한국 가면극 그 역사와 원리, 전경욱, 열화당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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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비문학개설, 장덕순 외3, 일조각, 서울,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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