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반공포로 석방과 그 의의
- 최초 등록일
- 2011.07.10
- 최종 저작일
- 20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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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민족 동족상잔의 참혹한 비극이었던 한국전쟁..그 결과 발생한 반공포로의 석방에 대하여 그 배경, 경위, 석방절차, 석방성공의 의의 등에 대해 당시 역사적 사료과 연설문, 통계자료 등을 첨부하여 자세히 논하였습니다.(총 6장)
목차
Ⅰ. 서 론
Ⅱ. 본 론
1. 반공포로 석방의 배경
2. 반공포로 석방의 경위
3. 반공포로 석방의 성과와 의의
Ⅲ. 결 론
본문내용
한국전쟁, 반공포로 석방과 그 의미
Ⅰ. 서 론
휴전협상이 진행되고 있었을 때 남한에서는 「휴전협정」에 반대하는 운동이 격렬하게 일어났다. 이승만대통령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휴전협정」이 체결되면 한반도에 또 다시 전쟁이 일어날 것을 매우 우려했다. 미국은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나면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위한 회담이 곧 바로 개시될 것이라고 약속하고 이승만대통령을 설득했다. 사실 미국은 「휴전협정」 체결 이전에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할 경우 공산측이 휴전협상을 중단할지 모른다는 우려를 갖고 있었다. 이승만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은 반공포로들에게 자유를 되찾게 해주려는 목적 뿐만 아니라 방위조약과 관련하여 미국을 외교적으로 압박하려는 목적도 갖고 있었다. 1953년 6월 18일 자정을 전후하여 유엔군이 관리하고 있던 부산, 마산, 대구, 영천, 논산, 광주, 부평 등의 반공포로 수용소에서 2만7천여명의 포로들을 석방시켰다. 부평수용소에서는 400명이 탈출하면서 30명이 사망했다. 6월 21일까지 계속된 반공포로들의 탈출과정에서 모두 61명의 포로가 희생되었고 10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휴전협상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상태에서 일어난 반공포로 석방 사건은 미국과 유엔 참전국들을 경악시켰다. 공산측은 탈출한 반공포로들을 전원 재수용할 것을 요구하면서 「휴전협정」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러한 유엔군측과 공산측의 반응은 반공포로 석방 이전에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승만대통령은 휴전협상이 한국 정부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깊은 불만을 갖고 있었다. 반공포로 석방을 통해서 이승만대통령은 한국 정부의 동의 없이는 휴전은 현실적 의미를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유엔군측과 공산측 모두에게 분명히 하고 휴전협상 과정 및 체결 이후에도 한국 정부의 입지를 강화하려고 했다. 미국 내에서도 반공포로 석방을 지지하는 여론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군 포로들을 본국으로 돌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