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재 이언적의 태극론과 경세사상
- 최초 등록일
- 2011.02.25
- 최종 저작일
- 2011.02
- 7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500원
소개글
16세기 조선의 성리학을 대표하는 회재 이언적의 생애와 사상을 리포터 형식으로 작성한 글.
목차
회재 이언적의 생애와 사상
1. 회재의 생애와 시대적 상황
2. 회재의 경세사상과 시국론
(1) 민중에 관한 새로운 인식
(2) 군주론과 인재등용론
(3) 국방론
3. 조한보와 이언적의 태극논쟁
(1) 문제제기
(2) 태극논쟁의 내용과 전개
4. 태극논쟁의 역사적 의의
본문내용
1. 회재의 생애와 시대적 상황
1491년(성종 22) 경주 양좌촌(良佐村)에서 태어나 1553년(명종 8) 강계(江界) 적소(謫所)에서 세상을 떠난 회재의 생애는 16세기의 전반기에 해당한다. 16세기 전반기는 조선왕조의 기본적 통치 질서가 그 자체의 모순의 누적으로 동요 및 변화를 보이기 시작한 시기이다. 첫째, 과전법(科田法)으로 건국의 기초를 삼았던 토지제도가 직전법(職田法)으로 바뀌었다가 이 시기에 이르면 그것마저도 폐지되고 권력층에 의한 대토지소유가 점차 자행되는 동시에 국가는 토지에 대한 통제력을 거의 상실하였다. 둘째, 병농일치(兵農一致)의 원칙 하에 오위(五衛) 중심으로 조직된 건국 이래의 군사제도가 파탄을 일으켜서 많은 일반 병역의무자들로부터 병역에 복무하는 대신 군포(軍布)라는 병역세를 징수하여 국가경비에 충당하는 동시에 오직 동원된 군사만을 고통 속에 남겨 놓았다. 말하자면 의무병제(義務兵制)를 유지할 수 없었던 반면, 용병제(傭兵制)와 같은 새로운 제도가 옳게 수립되지도 않아 군정(軍政)은 엉망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와 같은 토지제도, 군사제도가 문란해지며 다시 정치적으로 상당히 달라진 현상이 나타났다. 그것은 공신(功臣), 척신(戚臣)들을 주축으로 하는 이른바 훈구파(勳舊派) 귀족이 중앙정부에서 세력을 펴고 왕권은 상대적으로 약화되고 있는 것이다. 연산군의 추방과 중종의 옹립이 모두 신하들의 주동으로 이루어지면서 왕권은 매우 견제를 받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으며 또한 이 시기에 등장하는 비변사(備邊司)가 차차 의정부(議政府)의 실권을 앗아가 더욱 그러한 추세를 조장시켰다. 이에 따라 훈구파 귀족은 권력을 이용하여 대토지의 점취(占取)와 공공연한 뇌물수수에 사치와 방종을 일삼았고 부정과 부패를 상하에 만연시켰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