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언적의 생애
- 최초 등록일
- 2006.11.22
- 최종 저작일
- 20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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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시대 유명학 학자인 이언적의 생애를 통해 그의 생애와 업적을 알아본다.
목차
1. 생 애
2. 사 상
<1>太極
(1)회재의 太極觀
(2)회재의 태극관과 忘機堂의 태극관의 비교
<2>仁德論
(1)회재의 仁德論
(2)회재의 仁德論의 의의
<3>心性觀
(1) 정주 성리학의 心性觀
<4>本末終始論
(1) 회재의 本末終始論의 의미
(2)物과 事
3. 맺음말
본문내용
1. 생 애
퇴계학파의 선구자인 회재 이언적(1491-1553)은 경주 양동마을에서 출생하여 강계에서 63세로 일생을 마쳤다. 성종 연간에 출생하였으나 험난했던 연산조를 소년시절에 외삼촌인 손중돈에게서 글을 배웠고 글공부로 보냈다. 중종대로 접어들어 28세 때 급제했고 곧 종9품으로 관직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으며, 왕을 도울 수 있는 훌륭한 인재라는 평을 받았고 이언적은 31세 때 성종 임금의 사랑으로 이름에 `언`이라는 글자를 하사 받은 당대의 젊은 성리학자였다. 그 후 회재의 관직 생활은 계속되어 점차로 승진하였으나 김안로, 심언광의 기용을 반대하다가 파직되어 좌천된 뒤로부터는 향리에 獨樂堂을 짓고 산수를 사랑하며 독서를 즐기게 된 듯이 보인다.獨樂堂에서 지은 많은 시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임거십오영이고 옥산서원에서 옥계천을 따라 조금 오르면 독락당이 보이는데, 이언적은 낙향해서 이곳 산과 바위에다 사산오대 이름을 지으니 바로 자옥산,도덕산,화개산,무학산,탁영대,징심대,관어대 ,영귀대,선심대이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불려지고 있습니다. 그 뒤 김안로 일당이 물러가고 다시 기용되었으나 명종 때 윤원형 일파의 모함에 걸려 57세에 평안북도 강계로 귀양이 보내지고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선조 때 영의정이 추종되고 광해군 2년(1610)에 玉山書院에 배향되었다. 이상으로 볼 때 그의 일생은 정국의 변동과 사회의 불안이 심하였던 때였다. 그러므로 정치인으로서는 격동하는 정국에 시련을 받았고, 학자로서는 문화의 위축 속에 고역을 면할 수 없었다. 따라서 정치적으로는 군주에게 상소하여 충성을 하였고, 문화적으로는 「회재선생문집」(보물 제586호)을 비롯하여 논문과 저서로 그의 업적을 쌓았다. 주자의 『대학장구』에 의문을 제기하고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 1549년), 『속대학혹문』(續大學或問) 들을 만들기도 하였고, 그가 26세 때 지은 「勸學者」에는 성인을 배우고자 하는 학문의 자세가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성리설에 대한 정연한 이론을 바탕으로 육구연(陸九淵, 象山)의 학문과 선학사상을 비판하였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