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랑론
- 최초 등록일
- 2011.01.07
- 최종 저작일
- 20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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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김영랑이란 시인에 관해서 자기가 조사하고 그 조사한 내용과 소감을 간략하게 한 장에 정리한 것입니다. 한 장이기는 하나 좌우상하 여백을 거의 없게 하여 실질적인 분량은 한장 반정도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시인의 생애와 그의 작품에 관한 평들을 책과 논문을 참고하여 작성했습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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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개인학습과제물>
김영랑론
김영랑의 본명은 윤식으로 1903년 전남 강진군에서 태어났다. 휘문의숙 동문이던 정지용, 동경 유학시절 동기였던 박용철 등과 함께 『시문학』의 창간 동인으로 참가해 「쓸쓸한 뫼 앞에」,「제야」등의 시를 창간호에 실었고, 이후에 『문학』지에는「그밖에 더 아실이」 등을 발표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춘향」,「독을 차고」, 「모란이 피기까지는」등이 있다.
영랑의 조부가 500석이 넘는 지주였기에 부유한 유년시절을 보내기는 했지만, 결코 자신이 원하는 바를 다 이루지는 못한 듯하다. 엄격한 유교집안이었기 때문에 특히 아버지에 의해 원하지 않던 사람과의 결혼, 사랑하던 여인 당시 최고의 무용가 최승희와의 결혼좌절, 음악전공의 좌절 등이 그것이다.
1935년 11월 『영랑시집』이 나왔는데, 이는 그의 절친한 친구인 박용철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 영랑은 시집이 나온 이후 시를 발표하지 않다가, 1938년 9월부터 1940년 8월까지 작품을 발표하다가 1940년 9월 「춘향」을 발표하고 1946년 12월 10일자 『동아일보』에 시「북」을 발표할 때까지 6년여의 오랜 침묵 기를 가졌었다. 이 침묵은 영랑의 문학적 저항이라고 할 수 있다. 영랑은 일제 말 암흑기 군국 파시즘 체제가 강요했던 신사참배와 창시개명을 끝까지 거부한 몇 안 되는 우리 문인 중의 한 사람이었다. 당시 그가 삭발을 거부하고 ‘김씨로 창씨했소’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일제가 강요하던 국민복을 입지 않고 한복만 즐겨 입고 다녔다는 사실 등에서 영랑의 저항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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