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송 초기 사회의 제모순과 개혁운동
- 최초 등록일
- 2010.04.13
- 최종 저작일
- 20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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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송 초기 사회의 제모순과 개혁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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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송은 과거제도의 정형화와 한사계층의 확대를 통해 문신관료 사대부사회를 열었다. 과거를 통해 관직은 얻은 관원들은 관․직․차견으로 분리임명 되어 중복설치의 문제가 나타났고. 태종과 진종시기에 등용된 관원의 수가 크게 증가였다. 특히 3년에 한번 마감하는 인사고과제도는 능력에 관계없이 고관에 오를 수 있었으며, 은음제도 역시 관료 증가의 한 원인이었다. 이렇게 관료의 수가 급격히 증가하자 일부 관리들은 계획성 있는 업무보다는 단지 황제의 명만을 따르고 관직유지에만 힘쓰는 등 많은 폐단을 낳아, 이른바 용관의 폐단이 나타났다. 그리고 대북방 유목민족에 대한 세페부담의 증가와 관리의 증가에 따른 녹봉의 증가로 재정지출이 확대되었으나, 관리들에게는 면세권이 있었기 때문에 국가 재정확보의 통로가 감소하여 국가의 재정난이 계속되었다. 또 당말기를 기점으로 부병제가 사라지고 모병제(용병제도)를 채택하여 병사들에 대한 녹봉도 제공해야 했다. 이때 병사들에 대한 퇴지연한을 정하지 않고 빈민구제의 일환으로 병사를 모집하여 그 지역의 생산노동력이 부족해졌다. 이러한 용관, 용비, 용군의 폐단이 누적되어 국가재정의 고갈현상이 나타났다.
경력년간(1014~1048)에는 내외모순의 급격한 격화에 직면하여 관료는 방대하였으나 효율은 적었고 요와 서하는 부단히 침략해 민생은 궁핍했지만 부세는 지속적으로 증가해 각지의 농민과 병사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이에 사대부 관료층으로부터의 개혁정치가 시도되었는데 주로 관료제도의 개혁(특히, 이치법)을 통해 황권을 강화하려 했으며 부국과 강병을 위해 재정문제와 병사제도를 바로 잡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범중엄은 폐정개혁에 대한 주장을 하였는데 이를 경력신정이라 한다. 먼저 이치법에 관련하여 명출척, 억요행, 택장관, 정공거를, 재정에 관련하여 감요역, 후농상, 균공전을, 병사에 관련하여 수무비, 중앙권력 강화를 위해 담은신, 중명령의 개혁안을 제시했다. 범중엄의 개혁은 전반적으로 제도의 확립과 관리의 기강을 진작시켜 통치를 공고히 하고자 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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