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그랑주
- 최초 등록일
- 2009.10.22
- 최종 저작일
- 20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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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라그랑주의 생애, 공적
네 개의 제곱수들의 정리
목차
가. 라그랑주의 생애
나. 라그랑주의 몇가지 공적
다. 네 개의 제곱수에 대한 정리
참고도서
본문내용
가. 라그랑주의 생애
“라그랑주는 수학 세계에 우뚝 솟은 긍지 높은 피라미드이다.” 이 말은 바로 나폴레옹 바나파르트가 18세기의 위대하고 가장 겸손했던 수학자 죠지프 루이 라그랑주(Joseph Louis Lagrange, 1736∼1813)에게 경의를 표하며 부여한 비평이다.
라그랑주는 프랑스인과 이탈리아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인데 프랑스인의 피가 더 진하다. 아버지는 자기의 재산과 아내의 지참금으로 상당히 부유했다. 그러나 구제불능의 투기꾼이었기에 아들이 상속받을 때쯤에는 상속해 줄 재산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라그랑주는 후일 이 불해을 되돌아보며 생애 중 가장 다행스러운 일이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일 재산을 상속받았더라면 나는 아마 수학에다 내 운명을 걸지는 않았을 것이다.”
처음부터 라그랑주는 해석학자였지 기하학자는 아니었다. 그에게서 우리는, 수학연구에서 거의 필연적이 된 전문화의 두드러진 예를 볼 수 있다. 라그랑주의 해석학적 경향은 그의 걸작 『해석역학』에 강하게 나타난다. 서문에 “이 작품에는 그림이 하나도 없다”고 말했다. 이것은 그가 19세의 소년일 때 토리노에서 계획했던 것인데, 출판된 것은 1788년 그의 나이 52세일 때 파리에서였다.
1764년에 라그랑주는 파리로 건너갔고, 거기서 프랑스의 수학자들을 만났다. 클레로는 다음과 같이 그를 기술하고 있다.
“젊은이로서, 그의 재능은 겸손 못지 않게 뛰어났으며, 그는 기질은 온화했지만, 우울증 증세가 있었다. 그는 연구를 하는 것 이외에 다른 어떤 즐거움도 알지 못했다.”
1766년에 ‘유럽 최대의 국왕’이라 자칭하는 프리드리히로부터 베를린으로 초빙되었는데, 프리드리히는 그의 궁정에 ‘최대의 수학자’를 데리고 있다는 것을 명예롭게 여겼다. 1787년까지 라그랑주는 베를린에서 연구를 했고, 프리드리히 2세가 죽은 뒤 다시 파리로 돌아와 마리 앙투와네트의 총애를 받았다.
참고 자료
◦ 수학의 철학과 역사, 앵글린 지음, 류희찬·류성림 옮김, 경문사, 2003
◦ 수학을 만든 사람들, Bell. E T, 미래사, 1993
◦ 수학사, Eves, Howard, 경문사, 1995
◦ 수학의 역사, Boyer, Carl, 경문사,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