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 윤선도
- 최초 등록일
- 2009.09.10
- 최종 저작일
- 20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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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고산 윤선도는 서울 연화방에서 태어나 여덟살 때 종가인 윤유기의 댁에 양자입적하고 17세 때 진사 초시에 합격한다. 그는 세상과의 모순에 대해 화해를 시도하기보다, 시작을 통해 이를 해소, 극복하려 하지만 그 모순은 해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이첨 등을 처벌해야 한다는 탄핵상소로 함경도 경원에 유배당하는 등 고초를 겪는다.
대기만성이라 했던가. 42세 되던 봄, 그는 별시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동국제일책이란 상찬까지 듣는다. 고결한 성품 탓일까, 어쩔 수 없는 현실과의 불화때문이었을까. 관직에 올랐지만 좌천과 파직, 귀양이 연속되자 51세 때엔 아예 제주도에 은거하기로 마음 먹는다. 자연마저도 시인 앞에선 숙연했음일까. 고산은 항해 도중 태풍을 만나 산수 수려한 보길도 부용동의 품에 안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한 곳에 거처를 정하지 못한 그의 운명은 그를 경상도 영덕으로, 다시 해남 금쇄동, 문소동, 수정동으로, 그리고 이순에 이르러서야 다시 몽매에 그리던 부용동에 들게 한다. 그 후 잠시 조정에 들었으나 67세에 다시 부용동으로 돌아와 필생의 역작인 세연정무대를 증축하고 금쇄동, 수정동을 오가며 작시를 즐기고 지국총의 흥취에 젖어 목놓아 어부사시사를 부르며, 그곳 낙서재에서 제자들을 모아 가르치는데 전념한다.
‘출사즉직언, 직언즉유배’. 하늘이 시인에게만 특별히 내린 신산스런 삶의 공식인가. 72세 때 다시 공조참의에 임명됐으나 수차례에 걸친 직언으로 세 번째이자 마지막 유배길에 오른다. 유배에서 풀려난 81세, 보길도로 내려가 부용동에서 침거하다 85세 되던 1671년 6월 11일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객이 되었다. 3개월 후 살아 생전, 자신이 터를 정한 해남군 현산면 구시리 금쇄동으로 옮겨 안장된다. 영혼만은 이승을 빠져나가지 못했음일까. 그의 유업을 기려 충헌공이란 시호가 내려졌으나 관작과 시호를 둘러싼 노론 일파의 모함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다 사후 57년만에 영조에 의해 시호 및 그의 위상이 분명해졌다.
고산은 평생 동안 세 차례에 걸쳐 14년을 유배로 보냈다. 그 중에서도 처음과 나중의 유배는 험하고도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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