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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시대 초상화 정리"에 대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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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초상화의 연원과 전개
2. 어진
3. 사대부 초상화
4. 진영
5. 20세기 근대기 초상화
본문내용
■ 초상화의 연원과 전개
한국의 초상화가 어느 시기에 처음 나타났는지는 확단하기 어렵지만 현존하는 문헌기록이나 작품을 통해 연원을 살펴본다면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南浦 梅山里 狩獵塚>이나 <평남 안성리 雙楹塚>, <南浦 德興里 壁畵古墳>의 묘주 초상은 특정 인물을 형상화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실제 인물과 얼마나 닮게 그려졌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기 때문에 이들을 초상화라고 보기 보다는 일종의 유형적 인물화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삼국시대에 재세했던 고승들의 「眞影拜觀記」가 고려시대 문헌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들 초상화가 삼국시대에 제작되었다고 단언하기는 어려우나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면 왕의 초상화가 사찰에 벽화형식으로 그려지고 여러 곳에 影殿을 설립하여 봉안하는 방식을 취했던 것을 알 수 있으며, 여러 비문이나 문헌 기록을 통해 僧像 제작 또한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 이때 일반 사대부초상으로는 <崔致遠 肖像>이 기록과 함께 작품으로 전해오고 있다.
고려시대에 오면 왕과 왕후 초상의 영전 봉안 기록이 보이며, ‘壁上功臣’, ‘圖形功臣’이란 칭호 하에 각종 공신도상이 그려졌다. 이와 더불어 사대부상에 관련된 題記와 贊文이 여러 개인 문집이 보이며, 진영 또한 많이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 이르면 유교를 실천적 지도이념으로 표방하면서 충효사상, 학덕이나 인품을 지닌 인물을 숭배하는 숭현사상에 의거하여 眞殿, 사당, 영당, 서원 등이 크게 발달하였다. 이에 봉안하고 향사할 대상으로서 초상화에 대한 수효가 많았다. 또한 왕명에 의해 공신상이 그려지고 그밖에 기로소에 들어간 것을 기념하기 위한 耆老圖像 및 진영의 제작이 적지 않게 행해져 조선시대에 이르면 가장 많은 수의 초상화가 제작되었다.
■어진
御眞이란 왕의 초상화를 말하며 왕의 초상화를 지칭하는 용어로는 御容, 晬容, 眞容, 聖容, 王影 등이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그러다 승정원일기를 보면 1713년 숙종어진도사 때에 이르러, 대신들 간의 논의를 거쳐 어진이라 일컫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는 결정을 보였지만, 그후 어용이라는 용어 역시 조선시대 말까지 빈번히 병용되곤 하였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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