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필
- 최초 등록일
- 2009.03.27
- 최종 저작일
- 20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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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권필
목차
가. 생애 (1569~1612)
나. 문학적 성향 (文學的 性向)
다. 석주 권필 평가
본문내용
가. 생애 (1569~1612)
권필. 본관 안동. 자 여장(汝章). 호 석주(石洲)
1) 입신출세(立身出世) 포기(抛棄)
한양 마포에서 태어난 석주(石洲)는 여러 왕들의 실록(實錄)을 편찬(編纂)하는 등 오랫동안 사관(史官)을 지냈지만 절친한 벗이 직무(職務)와 관련해 화(禍)를 당하는 것을 보고 벼슬을 하는 중에도 평생 남과의 교유(交遊) 서로 사귀어 놀거나 왕래함.
를 끊고 폐쇄적 삶을 살았던 부친(父親) 권벽(權擘 : 1520~1593)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대수, 호는 습재이다.《중종실록》,《인종실록》,《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시문에 뛰어나 명나라로 내왕하는 외교문서를 주관하였다. 벼슬 외에는 오직 시에만 열중하였다. 문집에《습재집》이 있다.
과 불의한 세태와 타협하지 않는 형들의 영향을 받아 강인한 비판적 지성(批判的 知性)을 쌓았는데, 그리하여 누구보다 존경했던 스승 정철(鄭澈)이 왕세자(王世子) 책봉(冊封)을 둘러싸고 벌어진 1591년의 신묘당사(辛卯黨事)로 인해 아계 이산해(鵝溪 李山海 : 1539~1609) 등 동인(東人) 세력(勢力)의 모략(謀略)으로 귀양길에 오르자 정계(政界)에 환멸(幻滅)을 느끼고 입신출세(立身出世)의 길을 아주 접어버렸다.
그 후 동몽교관(童蒙敎官)이 되었으나 예조(禮曹)에 인사를 드리라 하자 끝내 벼슬을 버리고 강화도에서 많은 후진(後進)을 가르치며 살았으며, 또한 임진왜란때 주전론(主戰論)을 주장했으며, 주화론(主和論)을 폈던 신하의 목을 베라고 주장하기도 했고, 훗날 벼슬 없는 선비로 원접 행차(遠接 行次)에 시(詩)나 글을 짓는 제술관(製述官)으로 발탁돼 이름을 떨치기도 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