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의 선구자 연암 박지원
- 최초 등록일
- 2008.05.26
- 최종 저작일
- 20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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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실학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박지원에 대한 글입니다.
많은 참고 부탁드립니다.
목차
들어가며
시대상황
박지원 프로필
현실관과 정치목표
인성론 및 우주론
대외질서관
정책론
문학으로 본 연암
연암의 사상적 영향과 평가
본문내용
1. 들어가며..
연암 박지원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실학자이다. 아니 어쩌면 소설가로 더 잘 알려져 있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연암이 누리고 있는 유명세에 비하여 막상 우리는 그에 대해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 명분론보다는 현실론을 더 중시하는 현대에 발전 논리 속에서 연암의 사상을 높이 평가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이 글에서는 그러한 발전 논리 속에서의 연암에 대한 인식과 평가를 지양하고 당시 성리학적인 명분 사회에서 연암의 사상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고자 한다.
2. 박지원 (朴趾源, 1737-1805):
호는 연암(燕巖) 이외에 연상(煙湘)과 열상외사(洌上外史) 등이 있고 자는 중미(仲美) 또는 미중(美仲)이라고 했음. 서인(西人) 노론(老論)으로 분류되는 반남(潘南) 박씨 양반가문에서 출생했으나 어려서 일찍 부친이 별세했기에 경제적으로 매우 빈곤한 환경에서 조부의 보살핌 아래에서 성장했다. 16세 때 결혼과 더불어 학업에 전념했으나 과거에는 응시하지 않았고 20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당대의 뛰어난 실학적 지식인들이었던 홍대용을 비롯하여 서얼 출신의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등과 폭넓은 인적 ‧ 사상적 교류를 가졌다고 함. 이후 박지원은 41세(1777년, 정조 초년) 때 세도가 홍국영 일파의 박해를 피해 개성과 인접한 황해도 연암골로 이사했으며 그곳에서 직접 농업에 종사함은 물론 중국과의 무역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또한 44세(1780년 정조 4년) 때에는 삼종형 박명원(朴明源)을 따라 사신단의 일행으로 연경 및 열하(熱河)를 여행하고 중국학자들과 교류를 가짐으로써 그의 실학적 지식의 폭을 크게 확대시킬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장년기의 이와 같은 경험들이 박지원의 실학사상 형성과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음은 자명한 것이었다. 박지원은 정조의 인재등용책에 의해 50세(1786년)에 처음 관직에 등용된 이래 66세(1801년)까지 관직생활을 했다. 이 시기에 박지원은 피지배 노서민계층의 삶과 국가적 생산력의 발전에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각종 개혁론을 제시함으로써 청 ‧ 장년기에 구축된 자신의 실학사상을 실천에 옮기려고 노력했으며 관직생활을 사임한 후 3년 뒤인 69세에 사망했음.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