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유교사상, 최충과 구재학당
- 최초 등록일
- 2008.03.12
- 최종 저작일
- 20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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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최충의 생애와 구재학당의 의미와 역할, 의의
목차
1. 최충의 생애
2-1. 구재학당
2-2. 사학의 배경
2-3. 시중최공도와 문헌공도
3. 명칭과 그 의미
4-1. 최초의 사학, 그 의미와 영향
4-2. 사학12도
본문내용
1. 최충의 생애
고려의 문신. 문장과 글씨에 능하여 해동공자로 불렸다. 호는 성재, 월포, 방회재, 시호인 문헌으로 잘 알려져 있다.
최충은 벼슬이 수상에 이르고 현종 · 덕종 · 정종 · 문종 네 조정에 역사(歷仕)하였다. 치사(致仕) 뒤에도 군국(軍國)에 관한 큰일은 그에게 자문을 구할 정도로 신임이 지대하였다. 1005년 문과에 급제하여 우습유에 올랐고, 1013년 거란의 침입으로 소실된 역대의 문적을 재편수하는 국사수찬관(國史修撰官)을 겸하여《칠대실록(七代實錄)》을 편찬하는데 참여하였다. 정조 초에는 지공거가 되어 과거를 주관하였으며, 《현종실록(顯宗實錄)》편찬에 참여하였다. 문종이 즉위하자 문하시중이 되어, 법률관들에게 법률을 가르쳐 고려 형법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벼슬에서 물러나 송악산 아래 사숙을 열고 많은 인재를 배출했는데 이를 문헌공도(文憲公徒)라 했다.
2-1. 구재학당
말년의 최충은 자기 집 사랑방에 젊은이들을 모아 놓고 공부를 가르쳤다. 그리고 자기 재산을 털어 새 집을 짓고 방을 여러 개 만들어 학교 모양을 갖추었는데, 최충이 이 때 세운 학교가 우리 나라 역사상 최초로 설립된 사립학교였다. 세상 사람들은 최충이 세운 이 학교에 교실이 9개가 있다 하여 9재학당이라고 불렀다. 14~15세 이상의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문벌 자제들에게 악성(樂聖) 대중(大中) 성명(誠明) 경업(敬業) 조도(造道) 솔성(率性) 진덕(進德) 대화(大和) 대빙(待聘)의 9재(九齋)로 나누어 구경(九經)과 삼사(三史)를 가르쳤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