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포트. 독후감]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 최초 등록일
- 2007.11.27
- 최종 저작일
- 20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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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역사학-생활상,문화,경제,정치
목차
없음
본문내용
고려 태조가 남쪽을 정벌한 것은 토지를 욕심내서인가, 반역을 토벌하여 해서
인가. 오직 반역을 토벌하려 했기에 한 번 싸워 후백제 수천리의 강역을 항복시
킨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고려 태조의 위덕일지라도 응당 이와 같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땅을 얻고 나서 원흉을 용서하였으니 인의로 시작하고 이익
으로 끝낸 것이라. 어찌 심히 애석하지 않은가.
고려 태조가 후백제의 신검을 토벌하고도 그를 살려준 것에 대해 조선 후기
유학자인 유계가 평한 기록이다. 여기서 유계는 아버지 견훤을 배반한 신검을
혹평하는 한편 그런 신검을 토벌하였기에 왕건이 쉽게 승리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고 역사의 주인이 된 것은 이 때문만이 아니었
다. 신라말의 난세에 나타나 궁예와 견훤을 제치고 통일 대업을 이룩한 것은 그
만한 노력과 자질이 있엇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객관적 시각에서 왕건이 어떻게
후삼국을 통일했는가 분석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이는 우리 민족의 바람직한
지도자상을 생각하고 앞으로 민족의 재통일을 이룩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는 일
이라 하겠다.
.
궁예. 견훤. 왕건의 출현과 ‘후삼국 시대’의 성립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하대로 접어들면서 통치제제가 와해되기 시작하였다.
김양상이 혜공왕을 죽이고 선덕왕으로 즉위하여 하대가 시작된 이후 김경신과
김주원의 왕위 다툼은 김주원의 아들 김헌창의 반란으로 이어졌다. 흥덕왕이 죽
은 뒤에는 상대등 김균정과 시중 김명이 후계자 자리를 둘러싸고 싸움을 벌였
다. 이 싸움에서 패배한 김균정의 아들 김우징은 청해진 대사 장보고의 힘을 빌
어 민애왕을 내쫓고 왕이 되었다.
이러한 와중에 귀족이나 사원은 불법적으로 백성들의 토지를 탈점하였다. 권
력이나 문서위조, 고리대 등의 방법으로 농민들의 토지를 빼앗았던 것이다. 그러
자 토지를 잃은 농민들이 유민화되면서 정부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
작했고, 결국에는 889년(신라 진성여왕 3) 조세독촉을 계기로 농민봉기가 전개되
었다.
참고 자료
고려사람들은 어떡게 살았을까?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