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생애, 갈등, 대외정책
- 최초 등록일
- 2007.11.26
- 최종 저작일
- 20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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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생애 및 성장과정을 살펴보고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갈등과 대외정치를 바탕으로 그들의 업적을 평가한 레포트입니다.
목차
서론
본론
1. 생애 및 성장과정
2.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대결
1) 왕후간택과 대원군
2) 명성황후와 대원군의 갈등의 전개과정
3) 갈등의 양상
4) 갈등의 결말
3.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지지기반
4.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정치
결론
본문내용
서론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 “쇄국이냐 개국이냐”에 대해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당시(19세기 후 반)의 국제 정세에 대해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어떠한 상황 하에서 그들은 쇄국과 개국이라는 선택을 하였는지를 우리가 판단해 보기 위해서는 당시 국제 정세에 대한 개괄적인 이해가 뒷받침 되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보고서의 첫 부분에 당시 서구 열강의 선두 주자였던 영국, 러시아와 동아시아 삼국 즉 조선, 일본, 중국이라는 아시아 국가들 간에 얽혀 있었던 외교 관계에 대하여 저술 하였다.
19세기는 흔히들 ‘제국주의 시대’라 일컫는다. 유럽에서는 통일된 독일의 탄생과 발달한 산업자본과 해군력을 앞세운 영국의 외교로 한동안의 안정을 찾게 되었다. 영국은 당시의 국제 정세에 주도적인 국가였기 때문에 이 시기를 `Pax Britanika`이라고도 부른다. 김혜승. 국제정치사. 2002
영국 외교의 가장 궁극적인 목적은 현상 유지 정책으로써 러시아의 팽창을 견제 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동아시아에서의 두 열강들의 대립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러시아는 끊임없이 부동항을 얻기 위해 남하정책을 고수했고 이 시기에 있어서 러시아는 동아시아 삼국에 관심을 돌리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일본과 중국(청)은 조선보다 이른 시기에 열강들과의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게 되고 주체적인 문호 개방이 아닌 서구열강들에 의한 강제적 개항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청과 일본은 이러한 외세의 침략에 대해 국내적 저항을 하였으나 그 방식에는 현저한 차이가 있었다. 청은 ‘양무운동(1861-1895)’ 이라는 이름으로 서구의 선진적 과학 기술을 받아들여 외세에 대항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중화사상의 충실과 향상을 꾀하기 위한 방편에 불과 하였고 근본적인 유교 질서의 붕괴로는 이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 한계가 있는 것이었다. 반면에 일본은 이전에 체결하였던 서구 열강과의 불평등조약의 파기를 궁극적인 목표로 삼아 국내 개혁 운동을 전개한다. 이른바 ‘메이지 유신(1868)’으로써 기존의 막번 체제를 파괴하고 계급제를 철폐 하는 등의 근본적 개혁으로 부국강병의 첫 걸음을 내딛게 된다.
참고 자료
김혜승. [국제 정치사]. 2002.
김기혁. [근대 한, 중, 일 관계사]. (주)동국 문화. 2007
박대원. [동아시아 외교사]. 서문당. 1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