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안사변과 제2차 국공합작과 내전, 항일전쟁
- 최초 등록일
- 2007.11.22
- 최종 저작일
- 20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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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A+ 받고 발표에 사용한 레포트입니다.
서안사변부터해서 국공내전까지 다루고 있는 자료로 국공합작, 항일전쟁까지
상세하게 포함되어 있습니다. 시기는 대략 1935 - 1949 입니다.
목차
항일민족통일전선과 국공합작의 추이
1. 서안사변
2. 제 2차국공합작과 항일전쟁
3. 국공내전과 중국공산당의 승리
본문내용
1937년 7월 7일 북경으로부터 약10킬로미터 떨어진 노구교(蘆溝橋)에서 사소한 총격사건을 구실로 일본군은 부근에 있던 제29군을 공격하고 중국군이 응전한 것이 이후 8년에 걸친 항일전쟁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 당시 여산(廬山)에서 국민당 하계 훈련단 모임을 주관하고 있었던 장개석은 7월 8일에 보고를 받자마자 즉시 응전을 결심하였다. 일본은 노구교 사변으로 천진과 북경을 점령한 다음 8월 13일, 상해에 대규모 공격을 가해 이른바 8․13사변을 일으켰다. 이 때 중공이 회의에서 ‘항일 구국 10대 강령’을 제시하였고 장개석도 이를 받아들여 제 2 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졌다. 따라서 중화 소비에트 공화국 임시 중앙 정부는 국민정부의 한 지방정부로 편입되고 연안의 홍군은 중앙군으로 재편되어 팔로군이 되었으며 장정 이후 안휘, 강서 일대에서 유격전을 벌이고 있던 홍군은 신편 제 4군, 즉 신사군으로 개편되었다. 이로써 중공군도 국민 정부군과 함께 정식으로 항일전에 참여하게 되어 이른바 일치 항일이 시작되었다.
일본은 노구교 사변을 일으켰을 때 중국과의 전쟁을 3개월이면 끝낼 수 있다고 속전속결의 전략을 취하였으나 전쟁 지역이 확대되고 상해에서의 전세가 부진하자 속화속결(速和速決)로 바꿔 독일을 통하여 화의를 제안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일본의 요구에 국내의 여론이 용납하지 않았다. 따라서 국민정부는 이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지구전(持久戰)을 결정하였으며 정부를 중경(重慶)으로 옮기기로 결정하였다. 반면에 일본도 11월 17일에 동경에 대본영을 설치하고 무력으로 중국을 굴복시키고자 하였다. 12월에 일본군은 남경을 점령하고 거의 한 달 동안 남녀노소를 구별하지 않고 30만 명을 살해하였다.
참고 자료
서진영, 『중국혁명사』, 한울, 1994.
신승하,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대명, 2001.
존 킹 페어뱅크, 멀 골드만,『新中國史』, 까치, 2006.
신승하, 『중국사(하)』, 대한교과서,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