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전쟁에 관하여
- 최초 등록일
- 2007.10.26
- 최종 저작일
- 20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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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대학교 서양사 레포트로 냈던 것입니다.
30년전쟁에 관한 중요내용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어있습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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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30년 전쟁은 1618-1648년 사이에 독일을 무대로 벌어진 전쟁으로 최후 최대의 종교전쟁이라고 일컬어진다.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종교와 왕조, 영토 및 통상에서의 적대관계 등 다양한 이유로 벌인 전쟁이다. 이 파괴적인 전쟁은 유럽 대륙 거의 전역에서 벌어졌으며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전쟁이 끝났을 때 유럽의 지도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변모했다.
30년 전쟁의 원인을 보면 독일에서 신·구교간 종교적 갈등이 표출되어 내전으로 시작되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주변 각국이 종교를 빙자하여 개입, 여기에 정치적 경제적 이해관계가 얽혀지고 복잡한 국제전의 양상을 띠었다. 이렇게 된 원인은 당시의 독일이 신성로마제국이라는 이름으로 덩치만 컸을 뿐 내용상으로는 300 여 개의 크고 작은 나라들로 분열되어 군웅할거의 무대가 되었으며, 황제를 계승하고 있었던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가는 제국의 안위 보다는 자신들의 영토에 더 많은 관심이 있었고, 다른 제후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이런 가운데 루터가 던진 파문은, 평소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많은 사람들을 자극하여, 그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종교개혁이라는 소용돌이로 독일 및 유럽 전체를 몰고 갔고, 급기야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로 겨우 봉합되었으나, 이는 미봉책에 불과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좀더 당시의 사정을 들여다보면,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로서 독일 안에서 신·구교도 간 화해가 일단 성립되었으나, 신교측에서는 루터파만 참석했을 뿐 칼뱅파는 제외되어 있었다. 그리고 "지배자의 종교는 그 지배자의 영지에서 신봉된다"는 원칙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신앙 선택은 오직 영주나 도시당국자에게만 허용되었을 뿐 일반인들은 지배자가 선택한 종교를 무조건 따라야만 했다. 그리고 카톨릭 교회의 고위 성직자가 신교로 개종하면 성직은 박탈되고, 영지는 카톨릭 교회에 보류하도록 되어 있어서 이것 또한 분쟁의 소지로 남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아우크스부르크 화약은 성립되었지만, 백가쟁명의 난세에서 이것이 그대로 지켜지기란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이런 체제가 50여 년간 겨우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서로간의 눈치를 살피고, 자가 세력의 부식에 열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카톨릭 측에서는 스페인에서 시작된 종교재판과 금서목록의 작성을, 교황청의 직권으로 광범하게 실시하고, 로욜라의 예수회 같은 것을 앞세워 실지 回復을 위한 전도에 열을 올리고 있었으며, 늦게 출발한 칼뱅파 역시 적극적으로 세력 확장을 도모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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