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정치파동
- 최초 등록일
- 2007.05.27
- 최종 저작일
- 20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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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우리가 흔히 발췌개헌안이라고 하는 부산정치파동에 대해 짧게 정리한 글입니다. 빠르게 정리가 필요하신 분께 필요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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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부산정치파동
실패로 끝나기는 했지만 제헌국회 말기 민국당의 내각제 개헌시도는 이승만이 충분히 위기를 느낄 만한 사건이었다. 이로 인해 5.30선거에서 반민국당 활동을 펼친 이승만의 활약에 민국당은 대패를 하고 만다. 5.30선거에서 주목할 점은 진보부터 극우까지 고르게 펼쳐있는 무소속의 대거 원내진출이다. 2대국회는 제헌 국회와 마찬가지로 어떠한 정치세력도 국회를 독점하지 못했다. 정당이 없는 이승만, 급격히 약화된 민국당 모두 유동적인 무소속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한국전쟁 발발 후 전쟁의 책임과 국민방위군사건, 거창양민학살사건으로 인해 국회 내 야당세력이 크게 강화되었다. 때문에 재선에 위험을 느낀 이승만은 국회 내 세력규합을 위한 창당과 직선제로의 개헌을 준비하고, 반대로 책임정치를 주장했던 의회는 내각책임제로의 개헌을 준비한다. 여기서 이승만은 왜 재적 3분의 2이상의 찬성을 필요로 하는 어려운 개헌을 고집했는지 생각해보자. 제헌국회에서 간선제로 뽑힌 이승만 대통령과 국회의 관계는 의회가 우위에 있었던 상황이었다. 당이 없는 이승만은 의회에 끌려 다닐 수도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먼저 해본다. 제헌국회 초기에는 소장파와 후기에는 민국당과의 대립했다. 국회의 이러한 견제로부터 벗어난 강력한 대통령이고 싶어한 것 같다.
51년 11월 30일 정부의 직선제 개헌안이 압도적 표차이로 부결되자, 이승만은 국회와 타협보다는 국회를 위협․비난하며 국회의원 소환 운동을 전개한다.
참고 자료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 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