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리코 페르미
- 최초 등록일
- 2006.11.28
- 최종 저작일
- 2006.11
- 5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000원
소개글
엔리코 페르미...
그는 세계제2차대전 당시 과학사의 획을 긋는 `맨해튼 계획`의 주도적인 과학자로서 핵물리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사람이다.
그런 그의 업적과 자신의 기술과 신념사이에서 갈등하는 인간적인 과학자의 모습과 고뇌, 그리고 그에게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을 서술했다.
목차
Ⅰ. 페르미의 생애
Ⅱ. 페르미, 그는 왜 주목받았나?
1)천재성
2) 강한 도전의식과 선구자적 태도
Ⅲ. 페르미, 갈등하다.
Ⅳ. 페르미가 남기는 메시지
Ⅴ.갈무리
본문내용
페르미의 생애
-1901년 9월 29일 로마에서 연년생의 세 자녀 중 막내로 출생하였다. 페르미의 어머니가 어린 세 자식을 한꺼번에 키우기가 힘들어 페르미가 3살이 될 때까지 시골에 맡겨져 자랐는데 어려서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해서인지 어딘가 멍한 구석이 있었다.
어릴 때부터 친구가 없었던 페르미와의 유일한 친구이자 형이었던 줄리오가 죽고 나서 페르미는 슬픔을 떨쳐내기 위하여 공부를 시작했다. 페르미는 피사 대학에서 공부할 기회를 부여받는다. 당시 피사대학 입학시험에서 `실의 진동` 에 관한 논문을 작성하여 교수들로부터 개별면담을 받았다고 한다.
1918년 피사의 왕립고등사범학교에 들어가 학위를 얻고, 괴팅겐대학교의 M.보른, 레이덴대학교의 P.에렌페스트에게 배웠으며, 1924년 피렌체대학교 역학·수학 강사, 1926년 로마대학교 이론물리학 교수가 되었다.
졸리오 퀴리 등에 의해 인공방사능이 발견되자(1934), 중성자에 의한 거의 모든 원소의 핵변환 가능성을 시사, 느린중성자에 의한 핵변환을 행하여 많은 방사성동위원소를 만들어 초우라늄원소 및 핵분열 연구의 길을 열었다. 1938년 중성자에 의한 인공방사능 연구의 업적으로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하였다.
이 무렵 무솔리니에 의한 파시즘의 압박을 의식, 노벨상 수상을 기회로 미국에 망명, 컬럼비아대학 교수가 되었으며, 그 곳에서 중성자 연구에 전념하였다.1942년 시카고대학 야금연구소로 옮겨 대형 원자로를 건설, 제어된 연쇄반응을 실현시켜, 핵에너지 해방이라는 업적을 쌓았다. 그 후 맨해튼계획에 참가하였으며, 제2차 세계대전 후 시카고대학 교수로 있었다. 원자로 이론, 우주선 이론, 가속기에 의한 중간자 연구 등을 계속하던 중 53세에 암으로 죽었다.
참고 자료
네이버, 지식in
그 외 네이버 웹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