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룡사탑]황룡사 9층 목탑
- 최초 등록일
- 2005.12.22
- 최종 저작일
- 20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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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황룡사 9층 목탑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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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 황룡사 창건
불교를 공인한 신라는 진평왕과 그 왕비의 이름을 석가불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름과 같은 백정과 마야라고 하였다. 호국 불교를 전파하는데 힘을 기울여 사회통합력을 높이려 하였다. 이와 같은 신라 불교의 속성을 잘 드러내고 그 목적을 위해 지어진 절이 황룡사이다. 황룡사는 국가적으로 가장 중요시되었던 최대 규모의 절로 신라 3보인 장육존상과 황룡사 9층목탑을 지닌 가장 대표적인 호국사찰이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절을 처음 짓게 된 동기에 대해서 `진흥왕 14년에 월성의 동쪽에 새로운 궁궐을 짓고자 했는데 그 곳에서 황룡이 나타났기 때문에 절로 고쳐 짓고 절의 이름을 황룡사라 했다`고 하였다.
황룡사에 세워졌던 황룡사 9층목탑은 경주 분지의 모든 곳에서 바라 볼 수 있는 80여 미터의 거대한 탑이었다. 9층목탑은 중국의 당나라에 유학했던 자장의 건의에 의해 선덕여왕 14년(645)에 완성되었다. 자장이 당나라에서 유학 중에 한 신인(神人)이 나타나 "황룡사 호국룡은 나의 장자로 범왕의 명을 받아 그 절을 보호하고 있으니, 본국에 돌아가 그 절에 9층탑을 이룩하면 이웃 나라가 항복하고 "구한"이 와서 조공하며 왕업이 길이 태평할 것이요, 탑을 세운 뒤에 팔관회를 베풀고 죄인을 구하면 외적이 해치지 못할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한다. 자장은 신라에 돌아와 선덕여왕에게 건의하여 9층목탑을 세우고 부처의 진신사리 100알을 탑 속에 봉안하였다. 황룡사는 신라 최대의 호국사찰이었기 때문에 왕이 직접 참여하여 국가의 평안을 비는 인왕회(仁王會), 국왕 참석 하에 100명의 고승이 모여 불경을 강론하는 백고좌강회(百高座講會) 등이 통일 전부터 신라가 망해 가는 경애왕 말년까지 여러 차례 있었다.
찰주본기(擦柱本記)에는 경문왕 때인 872년에는 탑을 헐고 다시 세웠다고 하며, 총높이가 225척[80m정도(40m 정도였다는 설도 있다)]이었다고 하는 황룡사 9층목탑은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벼락을 자주 맞아 여러 차례 수리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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