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외국인 묘지 공원을 다녀와서
- 최초 등록일
- 2005.11.27
- 최종 저작일
- 20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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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제가 외국인 묘지 공원을 다녀와서 쓴 글입니다. 학교 글쓰기 시간을 위한 독후감으로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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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야외 수업은 정말 오랜만에 가는 것이고 또한 가본적이 없는 외국인 묘지 공원을 가본다고 해서 설레었다. 왜냐하면 산 속에 한 개의 묘지가 안치되어 있는 것은 보았어도 그렇게 많은 무덤을 한번에 보는 것은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합정 역에서 내려 어느 정도 걸어가다 보니 공원이 나오고 안쪽으로 들어가 보니 나무와 풀로 어우러진 묘지 공원을 찾을 수 있었다. 내가 생각했던 묘지 공원의 느낌과는 사뭇 달랐다. 묘지 공원이라고 해서 음산하고 어두컴컴한 분위기일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햇빛이 아름답게 비치고 나무 또한 예쁘게 자라있었다. 하나, 둘, 셋……이렇게 천천히 무덤들을 볼 때 마다 무언가의 위대함과 부끄러움이 커져만 갔다. 또한 ‘다른 사람을 위해 사는 삶은 어떠할까?’ ‘내 자신도 그런 삶을 살 수 있을까?’ 에 대한 질문이 내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었다. 고국을 버리고 타지에서 선교활동을 벌인 사람들이 묻힌 이 무덤들은 내 자신을 다시 한번 돌아볼 수 있게 해준 기회였다.
가운데 길을 기준으로 오른쪽에 안치되어있는 무덤들 중에 헤론의 무덤이 있다. 헤론은 한국에서 최초의 의료 선교사로 임명된 사람이었다. 외국의 선교사들이 한국에 복음을 전해야 할 때 한국은 미개한 상태에 놓여있었다. 그리하여 선교사들은 복음과 또한 문명화와 근대화 사역을 함께 수행해야 했다. 그리하여 선교사들은 의료와 교육을 병행해야 했는데 알렌은 제중원을 설치 하였다. 이곳에서 언더우드, 헤론, 감리교 의료 선교사 겸 목사 스크랜톤이 일하였다. 처음에는 알렌이 와서 일하였으나 밀려오는 환자를 혼자서 치료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언더우드가 약국의 일을 도와주게 되었다. 1885년 5월에 내한한 스크랜톤과 함께 같은 해 6월 헤론이 가담하였다, 부족한 약품들, 의료 재료들로서는 감당하기 역부족이었다. 날씨가 더워지고 전염병은 창권하였다. 한국인들은 위생관념이 희박하여서 물을 끓여먹지 않아서 온 가족과 동네가 몰사하는 하는 일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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