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왕자의 난을 직접적으로 다룬 연구는 그리 많지 않지만, 즉위 초부터 강력한 왕권을 구축한 태종과 그 정권의 성격, 명분상의 취약성과 그러한 취약성을 극복하기 위한 왕권강화책 등에 대한 연구는 꾸준히 계속되어왔다.
여기서는 지금까지의 연구를 토대로 태조 이성계의 역성혁명부터 태종의 왕권강화 노력까지를 살펴보았다.
먼저 개국 초의 정치운영과 개국공신들 간의 관계, 특히 정도전과 이방원의 관계에 대해서 살펴보고, 둘째로, 이방원세력의 성격과 1 ,2차 왕자의 난에 대해 살펴보고 마지막으로 태종 왕위의 취약성과 그를 극복하기 위한 왕권강화책을 살펴보았다.
목차
Ⅰ. 머리말
Ⅱ. 본론
1. 개국 초의 정치운영과 공신집단의 분열
2. 세자책봉과 왕자의 난
Ⅲ. 맺음말
본문내용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하는데 중심이 된 세력은 태조 이성계 등의 신흥무인세력과 그의 아들들, 특히 다섯째 아들 방원과 그의 측근들, 그리고 정도전 등의 주자 성리학자 들이었다. 그 중에서 가장 공이 큰 사람은 단연 삼봉 정도전이었다. 정도전은 조선 개국의 실질적인 설계자였으며, 뛰어난 지략가였다. 그러나 정도전은 세자 책봉이라는 중요한 어려운 문제에서 실수를 하여 개국공신에서 일순간 역적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그는 신덕왕후 강씨의 충직한 사람이었고, 신권 위주의 정치 질서를 이상으로 생각하여 자신이 권력을 잡기에 쉬운 세자로 의안대군 방석을 지목하였다. 다섯째 왕자인 정안대군이 가장 왕좌를 할 만한 대목임을 알고 그를 지나치게 경계하다가 말년에 가서 나락으로 떨어진 것이다.
태조와 특별한 인연이 있는 무학대사는 ꡒ한양은 도성을 세우면 장자가 왕위에 오르기 힘든 터ꡓ라고 한 말이 개국 초부터 확실히 입증되듯이 조선은 역성혁명을 통해서 건국 되었고 이 후 10년 사이에 두 차례의 왕자의 난을 통해서 3명의 임금이 바뀌는 일이 생긴 것이다. 이렇게 두 차례의 쿠데타를 통해서 왕위에 오른 태종은 태조의 자식으로써, 특히 태조의 개국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그 왕위는 정당성을 가지기 힘들었다. 특히나 태조 이성계가 태종의 즉위를 기화로 해서 옥새를 들고 그가 왕이 되기 살던 함흥에 있는 본가로 들어가 버림으로써(이 때문에 함흥차사咸興差使의 고사가 유래되었다.) 태종정권은 정당성을 갖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태종은 왕세제가 된 그 순간부터 그의 재위기간 내내 그러한 취약성을 극복하기 위해서 왕권강화에 전력을 다하였다.
태종은 정치 ․ 경제 ․ 교육뿐만 아니라 외교와 민생안정에도 크게 기여하였으며, 왕권강화를 위해서 재위 말기에는 1 ․ 2차 왕자의 난을 함께 했던 정사공신들을 거의 제거하였으며, 세자 주변 정리를 위해서 자신의 처남들인 민무구 ․ 무질 형제를 제거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왕위는 자질이 있는 아들에게 물려주는 등의 노력을 했다.
태종이 설치한 집현전은 이후 세종 대에 왕권강화에 기여하였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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