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서론
2. 본론
(1) 선덕여왕의 즉위 배경과 과정
(2) 진덕여왕의 즉위 배경과 과정
(3) 진성여왕의 즉위 배경과 과정
3. 결론
- 정리 및 세 여왕의 비교
본문내용
신라 최초의 여왕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재위 632년 ~ 647년)의 이름은 덕만(德曼)으로, 진평왕(眞平王, 재위 579년 ~ 632년)의 장녀이다. 선덕여왕이 즉위하기 전 신라는 진흥왕(眞興王, 재위 540년 ~ 576년) 이후 넓어진 영토와 진평왕의 뛰어난 정치력으로 인해 국가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러나 왕실의 내부에서는 왕위 계승에서 문제점이 나타났다. 법흥왕(法興王, 재위 514 ~ 540) 이후 성립된 성골(聖骨)신분은 자신들의 신성성을 강조하기 위해 근친혼(近親婚)을 하였고, 진평왕 삼형제에게 모두 아들이 없자 결국 왕위를 이어갈 성골 신분의 남성들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삼국유사(三國遺事)』「왕력편(王曆篇)」에서는 이것을 선덕여왕이 즉위하게 된 배경으로 설명하고 있다. 왕실의 진종설(眞種說) 왕실의 신성성을 강조하기 위해 왕족인 석가모니의 왕실이 신라 왕실에서 다시 나타났다는 설.
도 선덕여왕의 즉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삼국사기 진평왕 본기에 따르면 진평왕의 이름은 백정(白凈)이고 부인은 마야부인(摩耶夫人)이며, 친동생들은 백반(伯飯)과 국반(國飯)으로 기록되어 있다. 본래 백정은 석가모니(釋迦牟尼)의 아버지 이름이고, 마야부인은 석가모니의 어머니 이름이며, 백반과 국반은 석가모니의 작은 아버지 이름이다. 이렇듯 신라가 불교를 받아들이면서 왕실에서는 석가모니의 가족들이 윤회하여 자신들로 태어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를 통하여 왕과 왕실의 권위를 더욱 높이려 하였다. 즉, 진평왕의 첫째 아이는 백정과 마야부인 사이에 태어난 석가모니가 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선덕여왕이 여성이라는 점만 제외하면 왕으로 즉위하는 것에 최고의 정당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진평왕이 자신의 장녀인 덕만을 왕위에 올리려 하자 여성의 즉위에 대해 귀족들이 반발하여 631(진평왕 53)년에 이찬(伊餐) 신라 17등관계(等官階) 중 두 번째 관위(官位). 자색(紫色)의 공복(公服)으로 신분을 표시하였다.
칠숙(柒宿)과 아찬(阿粲) 신라 관계(官階) 중 6등위로 6두품(六頭品:得難) 신분층이 오를 수 있는 한계 관계. 비색(緋色)의 공복으로 신분을 표시하였다.
석품(石品)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평왕은 곧 반란을 진압하였고, 덕만은 왕으로 즉위할 수 있었다. 이렇듯 진평왕이 반란을 진압하면서 성별보다는 혈통이 왕으로 즉위하는데 더 중요하다고 여겨지게 되었고, 이것은 선덕여왕이 남성 귀족들을 제치고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원인이 되었다.
참고 자료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연구부(역사연구실), 『(譯註)三國史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6
하정룡, 『(교감 역주)삼국유사』, 시공사, 2003
김기흥, 『(새롭게 쓴)한국고대사』, 역사비평사, 1993
김기흥, 『천년의 왕국 신라』, 역사비평사, 2000
박영규, 『 (한권으로 읽는)신라왕조실록 』, 웅진닷컴, 2001
박순정, 『선덕여왕을 클릭하면 큰 지혜가 보인다』, 오늘, 2000
조범환,『우리 역사의 여왕들』, 책세상, 2000
심규호, 『(연표와 사진으로 보는)중국사』, 일빛, 2002
미야자키 마사카츠, 『하룻밤에 읽는 중국사』, 중앙M&B, 2001
박경희, 『(연표와 사진으로 보는)일본사』, 일빛,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