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다 시게루
- 최초 등록일
- 2005.04.09
- 최종 저작일
- 20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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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1945년, 제 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더불어 패전국이 된 일본은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형태의 일본으로 접어들게 된다. GHQ(연합국군총사령부) 점령하의 일본에서 1946년 총리가 된 요시다 시게루는 전후 일본의 궤도를 설정하는 역할을 안게 된다.
요시다 시게루는 1878년 도사(土佐)의 자유당 지사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다케우치 쓰나(竹內綱)의 5남으로 도쿄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생후 18개월 만에 요코하마의 무역상 요시다 겐조의 양자가 된다. 요시다 겐조는 후쿠이 번의 무사인 와타나베의 장남이었고, 아버지 다케우치보다 열 살 젊었다. 당시 ‘저디 매디슨’ 상회의 지배인으로 있었는데, 다케우치 입장에서는 믿을 만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요시다 겐조는 시게루가 열한 살이 되었을 때 병사한다. 시게루는 당시 돈으로 50만엔 이상의 자산을 물려받았다. 덕분에 그는 89년의 생애 동안 한껏 돈을 쓰면서 돈 많은 도련님으로 성장했다. 요시다 시게루는 영국의 유명 양복점에 주문한 옷만 걸쳤다고 한다.
1906년 도쿄 대학 졸업 뒤 외교관 시험에 합격한 요시다 시게루는 외무성에 들어가 중국 펑텐에서 영사관보로 외교관 생활을 시작했다.
1909년 외교계의 거물이던 마키노 노부아키의 장녀 유키코와 결혼하고, 1928년 외무차관, 1930년 이탈리아 대사, 1936년 영국 대사등 주요 직책을 역임하지만, 외무성 동기인 히로타 고키에 비해 출세가 빨랐던 것은 아니다. 히로타는 외무장관과 수상을 역임했으나 패전 후에는 민간인의 신분으로 유일하게 A급 전범으로 처형되고 말았다. 이에 비해 요시다는 개성적인 성격으로 인해 2차 대전 패전 이전에는 정치의 중추에 진입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덕분에 패전 후 공직에서 추방당하지 않고 정치지도자로 등장할 수 있었다.
1939년 3월 영국 대사를 끝으로 퇴임한 뒤, 패전 직후인 1945년 9월 히가시쿠니노미야 내각 외무대신으로 취임하기까지 6년 반 동안 민간인으로 지내는 동안 요시다는 장인 마키노 노부아키의 도움으로 독일-이탈리아 추축 반대 활동을 벌였고, 미·일 개전 후에는 조기 종전을 달성하기 위해 공작했다. 당시 활동으로 헌병대에 연행되어 40일간 구금되기도 했다.
요시다는 합리주의적인 사고방식의 소유자였으나 열렬한 천황 숭배주의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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