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사] 명·청의 조세제도와 청제국에 대하여
- 최초 등록일
- 2004.12.21
- 최종 저작일
- 20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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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명·청 조세제도
2. 청제국
본문내용
만주인은 수렵 ·어로를 주된 생업으로 하는 퉁구스족의 일파로서 본래 여진이라 불리었다. 그 일부는 12세기에 화북로 진출하여 금 왕조를 세웠으나, 만주에 잔류한 대부분은 점차 정착농업을 영위하였으며, 명조 말기에는 해서·건주·야인의 3부로 나누어져 명나라의 간접통치를 받고 있었다. 명나라는 여진족의 여러 부족에 대하여 시종 분열정책을 취하였으나, 조선의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만주에 대한 명나라의 통제력이 이완된 틈을 타서 건주좌위의 수장 누르하치가 여진의 여러 부족을 통일하고 1616년 스스로 한의 위에 올라 국호를 후금이라 하고, 선양에 도읍하였다. 이 사람이 청의 태조이다. 명나라는 이를 제압하려 하였으나 오히려 사르후의 싸움에 대패하여 요하강 동쪽을 잃었다. 이어 일어난 황타이지(태종)는 먼저 명과 조선의 연합을 막기 위해 두 번에 걸쳐 조선에 침입하였다. 또 내몽골로 진출하여 차하르부를 정복하여 대원전국의 새를 얻음으로써 1636년 새삼스레 황제의 위에 올라 국호도 대청으로 고쳤다. 이 시기에 명왕조의 사회적 모순은 궁정의 당쟁과 농민반란으로 집중되어 나타났는데, 1644년 이자성을 지도자로 하는 농민군은 드디어 북경에 진입, 명나라를 멸망시켰다. 이때 농민군을 두려워한 지배계급은 청군과 강화, 산하이관을 지키고 있던 오삼계는 자진하여 청군을 관내로 안내하여 베이징을 회복시켰다. 태종의 아들 순치제는 재빨리 이자성 토벌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그를 호북으로 몰아내 궁사시킴과 동시에 중국 본토 지배의 대의명분을 획득하였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