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과 김구
- 최초 등록일
- 2014.12.11
- 최종 저작일
- 20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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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이승만과 김구의 공적 혹은 과오를 독립운동의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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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이승만과 김구는 빈번하게 비교되고, 자주 함께 거론되곤 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같은 시대를 살았던 독립 운동가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둘의 독립운동 노선이 현격하게 달랐기에 그러하다.
두 인물은 모두 우리나라를 위해 힘쓴 독립 운동가이므로, 이들의 공적 혹은 과오를 독립운동의 측면에서 살펴보자.
우선, 이승만의 독립운동 업적에 대해 알아보자. 1913년부터 하와이에 정착한 그는 교육과 선교 사업에 종사하였다. 한인중앙학교와 한인기독학교회를 세워 한인들에게 우리말과 민족혼을 가르쳤다. 그 결과로 양유찬 같은 인물이 배출되었고, 한인 노동자들에게 광복의 꿈을 북돋워 줌으로써 희망을 갖게 하였다.
1919년에 고국으로부터 3·1운동의 소식이 전달되자 이승만은 필라델피아로 가서 서재필과 함께 제1차 한인회의를 열고 독립 선언식을 가졌다.
3·1운동 직후에 국내외에서 6개 임시정부가 나타났는데, 그 중에서도 이승만은 서울의 기독교 계통 인사들이 세운 대한공화국, 즉 한성정부의 대통령으로서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그것이 다른 임시정부들과 통합함에 따라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구성하게 된 다음에는 임시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1920년 말에 상해에 부임하였고, 이동휘의 무력 투쟁론에 대항하여 외교 노선으로 맞섰다. 이는 독립 쟁취의 힘이 없는 지금에는 앞으로 독립을 가능케 할 일본과 미국의 전쟁에 대비해 외교와 선전의 방법으로 강대국 미국의 여론을 설득시켜 놓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전혀 소용이 없었고, 그는 6개월 만에 미국으로 돌아갔으며 1925년에 대통령직을 면직 당하였다.
참고 자료
독립운동가열전편찬위원회, 독립운동가 열전Ⅰ, 백산서당, 2005
김욱, 이승만 김구 조만식 그리고 나, 리앤리웍샵, 2004
장을병, 인물로 본 8·15공간, 범우,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