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원의 삼교관
- 최초 등록일
- 2014.12.02
- 최종 저작일
- 20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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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최치원의 삼교관(유교, 불교, 도교)에 대한 것을 짧게 정리하였습니다.
목차
1. 최치원의 생애
2. 최치원의 삼교관
-유교
-불교
-도교
-소결
3. 결론
본문내용
고운(孤雲) 최치원의 작품 중 추야우중(秋夜雨中)을 좋아한다. 20字에서 느껴지는 감성적인 리듬과 깊이 있는 의미는 배울 때마다 감탄을 준다. 내가 아는 최치원은 이처럼 뛰어난 시를 쓴, 신라 말 6두품 출신의 문장가라는 정도이다. 그의 시를 배우면서 그가 느꼈을 현실문제와 비통함은 느꼈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사상은 알지 못했다.
최치원은 유교를 비롯한 불교와 도교를 아우르는 작품을 썼으며 실제 그의 생활에도 나타난다. 살아생전 과거시험을 합격하기 위해 유교를 공부하였고 후에 가야산으로 들어가 은거하면서 불교를 접했으며, 사후에는 그가 신선이 되어 승천했다는 전설에서 알 수 있듯이 도교를 느낄 수 있다.
이 레포트에서 최치원의 삼교관-유․불․도(三敎觀-儒․佛․道)를 알아보고, 한국의 종교문제를 거론해보고자 한다.
1. 최치원의 생애
신라시대의 학자. 경주최씨(慶州崔氏)의 始祖. 자 고운(孤雲)·해운(海雲). 최치원(崔致遠)은 돌산 고허촌장 소벌도리의 24세손이다. 869년(경문왕 9) 13세로 당나라에 유학하고, 874년 과거에 급제, 선주(宣州) 표수현위(漂水縣尉)가 된 후, 승무랑(承務郞) 전중시어사내공봉(殿中侍御史 內供奉)으로 도통순관(都統巡官)에 올라 비은어대(緋銀魚袋)를 하사받고, 이어 자금어대(紫金魚袋)도 받았다. 879년(헌강왕 5) 황소(黃巢)의 난 때는, 고변(高 *)의 종사관(從事官)으로서 토황소격문 (討黃巢檄文)을 초하여, 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885년 귀국, 시독 겸 한림학사(侍讀兼 翰林學士) 수병부 시랑(守兵部 侍郞) 서서감 지사(瑞書監 知事)가 되었으나, 894년 시무책(時務策) 10여 조(條)를 진성여왕에게 상소, 문란한 국정을 통탄하고, 외직을 자청, 대산(大山) 등지의 태수(太守)를 지낸 후 아찬(阿飡)이 되었다.
그 후 관직을 내놓고 난세를 비관, 각지를 유랑하다가,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에서 여생을 마쳤다.
참고 자료
최영성, 『崔致遠의 哲學史想』, 아세아문화사, 2001.
한국철학사상사연구회, 『한국철학사상사』,심산문학,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