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회루
- 최초 등록일
- 2014.02.02
- 최종 저작일
- 2014.01
- 20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500원
목차
1. 누각이란?
2. 경복궁이란?
3. 경복궁 경회루
4. 경회루 보수공사
5. 경회루 관련 이야기
본문내용
1-1. 누각
그림 <영남루>
멀리 넓게 볼 수 있도록 다락구조로 높게 지어진 누각은 자연 속에서 여러 명이 또는 혼자서 풍류를 즐기며 정신수양의 장소로 활용되었던 건축물이다. 공부하고 학문을 연구하는 양반들은 과거시험에 급제하기 위해 공부를 지속했으며, 사서삼경이 중심이 되는 학문은 학문으로만이 아닌 생활화를 중요시했다. 그것은 자연인으로서의 청렴함과 검소한 생활로 자연에 순응하고자 하는 생활철학이었다. 또 누각은 공적인 것으로 접대와 풍류로 학문을 연마하면서 정신을 수양하는 높은 수준의 공간이 된다.
누각의 기록으로 오래된 것은 636년(백제 무왕 37년) “신하들과 망해루에서 잔치를 치렀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을 볼 수 있고, 《삼국사기》에서도 신라에 망은루, 명학루, 월상루 등의 누각이름을 찾아볼 수 있으며, 고구려 성곽그림에서도 누각형태의 건축물이 나타남으로써 궁궐 및 관아 건축이 공공시설로서 일찍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경주의 안압지와 임해전에서도 자연 속에서의 생활을 누리고자 인공 연못과 수림을 만들고 주위에 누정을 건축했음은 좋은 실례가 된다.
누각의 예를 들면, 서울 경복궁의 경회루, 창덕궁의 주합루, 삼척의 죽서루, 밀양의 영남루, 진주의 촉석루, 남원의 광한루 외에 궁전, 사찰, 학교, 서원, 성곽 등에 많이 있다.
<중 략>
경회루는 외국사신의 접대나 임금과 신하 사이에 벌어지는 연회 장소로 쓰일 목적으로 조선왕조 태종 12년(1412)에 지어졌다. 본래는 경복궁 침전 서쪽의 작은 누각으로 지었던 것을 태종 때 와서 크게 연못을 파고 장대한 누각으로 조성한 것이다. 그 후 성종 때 와서 건물이 기울어지자 집을 허물고 다시 고쳐지었는데 이 때 돌기둥에 용이나 꽃 장식을 하여 화려함을 더 했다. 이 화려했던 건물은 임진왜란이 일어나 경복궁이 불에 타면서 함께 소실되었다. 이후 경복궁이 재건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약 250년간 그대로 건물 터만 남아있었다. 경회루가 다시 모습을 되찾은 것은 조선말기인 고종 4년(1867)이었다.
참고 자료
문화재청발간. 慶會樓. 2000년 발간
http://www.cha.go.kr/unisearch/Uniresult_Db_View.jsp?VdkVgwKey=11,02240000,11&query
궁궐길라잡이 http://www.palaceguide.or.kr/walk/menu03.php#경회루
경복궁 둘러보기 http://ujuhim.co.kr/main80-09.htm
http://www.royalpalace.go.kr/html/data/data_03_08.jsp?dep1=3&dep2=3
http://sca.visitseoul.net/korean/architecture/i_palace01001.htm
http://www.art.go.kr/vli_dir/vli_dir08_pop_detail.jsp?ar_vvm_cd_seq=5123
http://kr.dic.yahoo.com/search/enc/result.html?pk=10571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