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인물 - 흑치상지
- 최초 등록일
- 2013.08.08
- 최종 저작일
- 20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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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백제의 부흥운동에 앞장섰던 흑치상지라는 인물에 대해서 조사하고 리포트로 작성하였습니다.
목차
1. 흑치상지는 누구인가 - 흑치상지의 일대기
2. 흑치상지의 부흥운동
3. 흑치상지의 이민과 그 후
4. 흑치상지의 죽음, 그리고 북망산으로
5. 배신자인가 이민세대의 성공자인가
본문내용
1. 흑치상지는 누구인가
생몰년 미상. 백제 말기의 장군. 서부출신으로 2품관인 달솔(達率)에 올라 풍달군장(風達郡將)을 겸하였다.
7척이 넘는 키에 용감하고 지략이 뛰어난 전형적인 군인이었다.
660년(의장왕 20)에 사비성이 나당연합군에 의하여 함락되어 백제가 망하자 부중(部衆)과 더불어 항복하였다.
그러나 그뒤 소정방이 의자왕과 태자 효(孝)를 비롯하여 여러 왕자를 사로잡고 당나라 군사를 풀어서 제멋대로 약탈하자, 이에 분개하여 가까운 족장 10여명과 반기를 들어 임존성(任存城: 지금의 大興)을 근거지로 광복운동을 전개하였다. 광복군은 곧 3만명으로 늘어나 한때 소정방의 군사를 물리치고 200여성을 되찾아 기세를 떨쳤다.
<중 략>
당군이 진흙 구덩이에 빠져 오도 가도 못하고 있을 때 흑치상지가 야밤에 결사대 500명을 거느리고 토번의 군영을 습격해 승리를 거두었다. 당 고종은 흑치상지의 지략을 높이 사 좌무위장군으로 봉하고 금 500냥과 비단 500필을 하사했다.
또한 토번의 찬파와 소화귀 등이 3만여 군사를 이끌고 공격했을 때도 흑치상지는 3천여 기병을 이끌고 야밤에 기습해 토번 2천여 군사의 목을 베고 양과 말 수만 필을 획득하기도 했다. 당 중종 수공(垂拱) 2년(686)에는 돌궐(투르크)이 변경을 침범하자 흑치상지가 다시 격퇴하러 나섰는데, 직접 기병 200명을 이끌고 선봉에서 질주하자 돌궐군이 도주했다. 흑치상지는 밤에 군영에 봉수처럼 불을 질렀는데 마침 동남쪽에서 대풍이 일자 돌궐군은 구원병이 오는 것으로 알고 도주했다고 <구당서>는 적고 있다.
참고 자료
네이버캐스트 인물과 역사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2167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한국학 중앙연구원- http://people.aks.ac.kr/index.aks
네이버 백과사전 http://handam.kr/70097313337
네이버 지식인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11 dirId=111001 docId=51622184 qb=7Z2R7LmY7IOB7KeA7J2YIOyDneyVoA== enc=utf8§ion=kin rank=2 search_sort=0 spq=0 pid=gpkFrU5Y7uNssbYNqBwssc--479658 sid=TpbivUCrlk4AAF7E67
한겨레 21-비운의 명장 흑치상지 [2010.09.17. 제828호] http://h21.hani.co.kr/arti/special/special_general/28127.html
네이버 뉴스-‘비운의 무장’ 흑치상지, 그는 배신자인가[2009-06-13 07:49]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 mid=sec sid1=106 oid=003 aid=00027251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