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 시인 연구-그의 시에 나타난 자유
- 최초 등록일
- 2013.05.05
- 최종 저작일
- 20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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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작년 현대시인론 수업 때 제출했던 레포트로 A+을 받았습니다. 도움 되길 바랍니다.^^
목차
Ⅰ. 서론 .2
Ⅱ. 본론 .2
1. 시어 ‘자유’의 첫 등장 .2
2. 4.19 시기에 나타난 자유의지 .3
3. 5.16 이후에 나타난 자유의지 .5
Ⅲ. 결론 .8
※참고문헌 .9
본문내용
Ⅰ. 서론
김수영은 1921년 김태욱의 셋째 아들(5남 3녀)로 태어났다. 위로 두 아이(1남 1녀)가 있었으나 세상을 떠났으므로 맏이로서 성장하며 건강이 좋지 않아 부모 형제들의 걱정과 근심 속에서 자랐다. 조양유치원과 한문 서당을 거쳐 어의동 공립 보통학교(효제초등학교)를 다녔고, 모든 면에서 월등한 수재였으나 잦은 잔병치레 탓에 상급 학교 입시에 거듭 실패하고 선린상업 전수과 야간부에 진학했다. 1941년 선린상업학교를 졸업 후, 일본으로 가서 동경상과대학 전문부에 입학하였고, 1943년 징집을 피해 귀국 후, 1944년 가족과 함께 만주 길림성(吉林省)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교원생활과 연극운동을 했다. 1945 해방 후 가족과 서울로 돌아온 후, 종로 2가에 ‘말리서사’란 헌 책방을 내고 있는 박인환과 만났고, 연희전문학교 영문과 4년에 편입하였으나 중퇴한 후로 ‘말리서사’에 자주 드나들며 김광균, 김기림, 이시우, 박일영, 등 당시 모더니스트들과 조우한다.
<중 략>
그의 시에서 이러한 자유에 대한 지향점이 구체적으로 나타난 시기인 4.19. 이를 전후한 시기에서 김수영은 ‘자유’를 ‘혁명’과 동의어로 보았고 가장 직접적으로 시 속에서 혁명과 자유에 대한 이상을 소리 높여 외친다. 하지만 혁명의 실패로 좌절을 맛보았고 5.16이 일어나자 시인의 환멸과 절망은 절정에 이르렀다. 그를 괴롭힌 것은 그토록 혁명을 원했으면서도 스스로 혁명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소시민에 대한 인식이었다. 때문에 김수영은 소시민적 자기비판을 보였고, 더불어 4.19 이후 혁명, 자유의 개념에 대한 천착과 역사와 전통에 대한 긍정을 보여주었다. 김수영에게 있어 ‘혁명’이라는 용어는 정치적인 의미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닌, 자유인으로서 완전한 인간에 도달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