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대통령과 노태우 대통령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 이 세 사람을 두고 정치적 리더쉽을 비교하다.
- 최초 등록일
- 2012.11.29
- 최종 저작일
- 20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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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 노태우 대통령, 김대중 대통령의 정치적 리더쉽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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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어디 있습니까? 지금 한남대교가 놓여 있는 곳까지 어렵게 지프를 몰아갔는데, 다리가 건설되기 전이라 한강을 건너는 일조차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당시 국가기간고속도로계획조사단장을 맡았던 윤영호씨가 한국도로공사 40년사에 남긴 증언이다. 박정희대통령이 대선공약으로 고속도로건설을 발표한 1967년 4월 29일부터 경부고속도로를 둘러싼 논란은 끊이지 않았다. 당시 야당에선 세계은행(IBRD)의 조사결과처럼 강원도와 서울을 잇는 동서간 고속도로가 더 시급하다 주장했고 박대통령측은 경부선 철로가 있는 곳에 고속도로 건설을 발표하며 논란이 더욱 커진 것이다. 정부는 1968년 2월 1일, 논란 속에 경부고속도로를 착공했다.
온 나라가 들썩인 경부고속도로 건설
해방 직후에 우리나라의 도로는 총 2만 4,031km였다. 그나마 5,263km의 국도 가운데 포장된 도로는 746.4km에 불과했다. 일제가 수탈을 위해 만들기 시작한 것이 우리나라 도로의 시작이었고 이어진 6.25를 거치면서 그마저도 황폐해져 상황은 더욱 좋지 않았다. 당시 서울과 부산을 오가는 가장 빠른 방법은 경부선 철도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그나마도 12시간이 꼬박 걸리는 거리였으니 이런 때에 경부고속도로 건설의 목표인 서울과 부산을 5시간 내로 달릴 수 있는 길을 건설하는 것은 공사의 적합성을 떠나 실로 초대형 프로젝트였다.
경부고속도로는 총 429억 원이 투입돼 2년 5개월 만에 완공됐다. 놀라운 속도였다. 시공에 16개 업체를 비롯해 3개 건설공병단까지 참여해 마치 군사작전처럼 진행된 사업이었고 연인원 892만 8,000명과 165만 대의 장비가 투입된 대형 사업이었으며 77명의 숭고한 희생자를 낳기도 한 사업이었다. 당시 박정희대통령은 축사를 통해 “순전히 우리 기술로 다른 나라에서 만든 고속도로에 비하면 훨씬 싼 값에 가장 빨리 완공하였다는 점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라고 말했다.
참고 자료
한국 국민에게 고함
꽃만 봐도 서럽고 그리운 날들
1026,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박대통령 관련 소설)
박정희, 한국의 탄생
다시 조명해본 박정희 대통령
노벨상의 교양을 읽는다.
사랑해요 DJ : 김대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