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삼국(중국,한국,일본)의 유교와 불교의 정치사상
- 최초 등록일
- 2012.10.27
- 최종 저작일
- 20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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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동아시아 삼국의 유교와 불교의 정치사상에 대한 레포트 입니다.
특히 16c이전의 동아시아 삼국에서 정치에 종교가 이용되고 중앙 집권화에 이용되는 등의
정치사상적인 관점으로 작성한 레포트입니다.
목차
없음
본문내용
16C 이전 동아시아의 정치체제는 전부 군주제였다. 군주제에서는 선거에 의해서 군주가 되는 경우가 혼란기에는 몇 번 있었으나 거의 없었다. 선거에 의해 군주가 되는 경우라도 그 이 후로는 또 다시 세습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농사의 풍흉이 부족의 생사를 절대적으로 좌우했던 부족국가에서는 일기와 같은 자연적 현상을 주관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절대적 존재, 혹은 그러한 절대적 존재와 인간 사이를 매개하는 중간자를 숭배했고 군장은 자신을 바로 그 중간자로 내세우며, 부족들의 신뢰를 바탕으로 정치활동을 해 나갔다. 이처럼 초기 부족 국가에서 조차 농사와 관련하여 통치자가 자신의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종교를 이용하였다. 하물며 한, 중, 일 동아시아 국가의 군주제에서 16C 이전 불교와 유교는 정치에 어떻게 이용 되었는지 동아시아의 불교, 유교 순서대로 살펴보자.
<중 략>
일본은 에도시대에 주자학을 국교로 채택했지만, 유교 지배 역사의 일천함과 종교·사상의 다양성으로 인하여 넓고 깊은 영향을 행사하지 못했다. 일본인들은 국교를 주자학으로 삼았음에도 불구하고 주자학에 비판적인 일본산고학·고문사학·양명학 등 다양한 사상운동을 전개함으로써, 주자학에 국가 전체가 매몰되지 않았다. 국가신도에 유교가 습합된 것도 일본 유교가 독자적인 지위를 주장하기 어려워 다른 사상 종교와의 타협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근대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는 자본주의체제에 이용될 수 있는 보다 익숙한 전통정신의 활용이 모색되었다. 이것이 유교를 활용하여 국민을 통합할 수 있는 정신을 제공하려는 노력이 나타난 까닭이다. 이 점은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잘 드러난다. 메이지 유신은 유교에 존립의 위기를 가져왔다. 전통적인 사민질서가 철폐되고, 서구의 지식을 활용하기 위하여 유교적 학습이 포기되었다. 그러다가 메이지 10년대에 국민의 사상 선도라는 목적으로 유교사상을 부활시키려는 움직임이 나타난다. 이는 유교를 중심으로 국민도덕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서양철학을 바탕으로 하여 유교 등 전통사상을 근대적으로 재편성하고 그것으로써 메이지정부에 봉사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 즉 새로운 국민도덕을 확립하는 것이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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