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사] 서구의 충격 이후의 상업과 수공업
- 최초 등록일
- 2002.11.30
- 최종 저작일
- 20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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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해외무역
2. 금융
3. 기선과 철도
4. 외자공업
5. 중국인 소유의 근대산업
6. 전시 그리고 전후의 산업
7. 산업화의 유산
8. 제국주의의 충격
본문내용
아편전쟁 이후 중국이 정치·군사적으로 약해진 틈을 타서 서양세력은 산업혁명의 힘을 바탕으로 중국의 상업부문과 수공업부문을 새로운 단계로 밀고 나갔다. 이러한 경제적 도전과 기회에 대해 중국이 왜 그렇게 완만하게 대응을 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제국주의에 의한 착취와 억압으로 인한 발전 노력 저해라는 측면과 중국 그 자체가 경제적 근대화의 장애요소라는 측면으로 논의되고 있다.
1. 해외무역
영국은 중국과의 무역에서 비단, 차등의 구입 중심에서, 19세기에 이르러 전에 없던 생산력이 증가하자 판매 중심으로 몰고갔다. 아편전쟁 때 교역이 정지되어서 일시적으로 수요가 많이 증가하여 전쟁이 끝난 후 영국의 면제품과 모직물은 좋은 가격으로 상당히 팔렸기 때문에 1842년 남경조약이 이루어질 당시만 해도 중국과의 무역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이 팽배했다. 그러나 1845년 이후 중국의 구매력은 계속 하강하여 무역은 침체되게 된다. 이로써 중국의 거대한 인구에게 무한히 팔 수 있다는 외국인의 순진한 꿈(소위 중국시장의 신화)은 착각으로 판명되었다.
㉠ 제 2차 아편전쟁(1856∼1860, 에로 호 전쟁)과 무역
중국과의 무역의 실패에 대해 영국인들은 자신과 자신의 경제전략을 탓하지 않고 중국인과 중국 관료의 정치적 방해를 탓하며, 더 많은 무역항을 개항할 것과 중국 국내에서 자유로이 여행하며 장사할 권리를 인정할 것을 중국 정부에 요구했다. 그리고 힘이야말로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생각한 문화적 오만함과 경제적 우둔함의 결과 전쟁이 일어나고 두번째 조약이 맺어졌다. 이 개혁으로 11개의 조약항이 개항되고 외국인의 국내 자유여행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무역의 신장은 실망스러울 정도로 더뎠다.
참고 자료
이스트만의 저서 참고했음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