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병합 조약 과정 (1905년부터 1910년까지)
- 최초 등록일
- 2012.09.07
- 최종 저작일
- 20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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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1905년부터 1910년까지의 기간에 한일병합 까지의 과정에서 맺어진 조약들에 대한 정리입니다.
목차
1. 머리말
2. 한일병합과정 (1905년부터 1910년까지)
(1) 한국과 일본 사이의 조약
1) 을사조약 (제2차 한일협약, 1905)
2) 제3차 한일협약 (한일신협약 / 정미7조약, 1907)
3) 기유각서(1909)
4) 한일병합조약 (경술국치, 1910. 8. 29)
(2) 일본과 타국 사이의 조약
1) 가쓰라-테프트 밀약 (1905. 7. 27)
2) 제2차 영일동맹 (1905. 8. 12)
3) 포츠머스 조약 (1905. 9. 5)
4. 맺음말
본문내용
일본은 메이지 유신이후 국서를 통해 국교 재계를 요청하기 위해 조선에게 국서를 보냈다. 하지만 여기에서 서계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이 서계를 ’전통적인 외교 격식’에 맞지 않는 문장의 사용, 외교관의 서양화 된 의복 문제 등으로 조선은 거부 하게 되고, 교섭은 또 다시 중단되었다. 서계문제로 인해 조선에서는 위정척사파를 중심으로 ‘왜양일체론’이 확산되었으며, 일본에서는 ‘정한론’이 촉발되었다. 이 때 ‘조선을 정벌하자’며 병합문제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와쿠라 등 해외를 살피고 돌아온 사절단이 정한론을 반대하게 되는데, 이유는 아직 외국을 넘볼 정도로 국력이 튼튼하지 못하니까 나라 안의 내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일본 내부의 문제는 세이난 전쟁으로 진압이 되었다. 이후 일본의 봉건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고, 개혁과 개방에 대해 급물살을 타게 된다.
통감정치 이후 실질적인 통치권을 모두 일본에 빼앗겨 형해화한 한국을 국호마저 박탈하려던 획책은 1909년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이후에 표면화하였다. 1910년 8월 22일에 대한제국과 일본 제국 사이에 맺어진 합병조약(合倂條約)이다. 대한제국의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제3대 한국 통감인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형식적인 회의를 거쳐 조약을 통과시켰으며, 조약의 공포는 8월 29일에 이루어져 대한제국은 이 길로 국권을 상실하게 된다.
이에 따라 일본이 한국을 합병하기 위하여 했던 과정들을 1905년에서 1910년에 맺어졌던 조약들을 통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참고 자료
1)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통감부 설치와 한국 식민지화》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2) 최덕수외, 《조약으로 본 한국근대사》 열린책들 2010.
3) 박도, 《일제 강점기 : 1910-1945》 눈빛 2010.
4) 이도형, <국치백년(國恥百年) 특별기획연재 : 19세기말/한국과 일본-1853~1910년 ; 한(韓): 러,일전쟁과 가쓰라-태프트밀약> 《한국논단》 2010.